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현 Apr 02. 2021

냉동했던 시들을 해동시키다

- 브런치 작가이신 최용훈 교수님의 영역 시'그리움의 무게'

https://brunch.co.kr/@yhchoi90rw/514


브런치에 시들을 슬며시 올린 이후로 브런치 작가이신 최교수님 덕분에 번번이 시가 날개옷을 입게 된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시는 부끄럽다.


백일장의 슬픈 기억



시를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백일장 날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글짓기를 지도하는 오숙자 선생님과 그 도시의 가장 한복판에 있는 성호 국민학교로 백일장에 참가하러 갔다.


저녁 땅거미가 다 지도록 나는 학교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서 선생님이 나오시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집까지 가는 길도 모르는 시절이었다. 나를 잊어버리고 가셨나 하는 두려움과 슬픔이 더 컸다.

이미 대부분의 아이들은 다 떠나고 몇몇 학교 아이들과 그 학교 선생님들만 초조하게 남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이미 상을 받을 아이들만 남은 것이었다.


허둥지둥 선생님이 나오시더니 심사위원들 앞에서 내가 쓴 시를 다시 써서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교실로 가는 길에 여태 심사위원들과 한바탕 싸웠다는 것이었다. 내 시가 통과하기는 했는데, 아이가 썼을 리가 없고, 분명히 선생님이 고쳐준 것에 틀림없으니, 상을 줄 수 없다는 쪽과 오선생님을 아는 분들은 그럴 리가 없다는 쪽이 옥신각신 하느라고 늦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더러 다시 시를 쓰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심사위원들 앞에서.


그때 오선생님은 노처녀셨다. 너무 깐깐하고 엄한 분이고 말도 거의 없는 분이셨다. 어린 나를 집에도 안 보내고 글을 다 쓸 때까지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교실에 혼자 남기는 무서운 분이셨다.

나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바짝 얼어서 다시 내가 제출한 시를 떠올리면서 썼다. 또 그날따라 이상하게 시도 길게 썼었다. 다시 쓴 시가 같을 리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내용이 너무나 환한 것이어서 내용은 똑같이 다시 썼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내가 왜 그런 시를 썼는지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제삿날이면 나는 바지락을 까는 당번이었다. 할아버지 제사 때면 제일 큰제사여서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조개를 깠다. 까놓은 바지락이 나물 무침용 양푼이로 한 가득히 되도록 깠다. 그래서 아직도 조개 까기는 내가 박사다.

할아버지 제사는 추운 한 겨울로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손을 녹여가며 조개를 까곤 했다. 조개를 깔 때마다 움찔움찔 오므리던 조개를 까는 것과, 초등학교 2학년 때 꽃상여에 실려 떠났다가 맨 땅에 깊이 들어가던 할아버지의 관, 그런 할아버지의 죽음을 넣어서 쓴 시였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심사위원들로서도 어린아이가 사람의 죽음과 조개의 죽음을 연결해서 쓴 것이 어처구니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백일장의 운문 제목 중의 하나가 '조개'였다. 남쪽 바다가 있는 도시여서 맞춤한 제목이었다. 그리고 나한테는 참 쉬운 제목이었다.

어쨌든 그 일은 무사히 통과했지만 그 대신 너무 아이답지 않은 터무니없는 내용이니 장원은 다른 아이를 주고 나는 바로 아래인 차상을 주기로 결정되었다.  



쓰고 싶은 것을 쓰라고 했지만



그때부터 시란 '다운 것'을 써야 하는구나 라는 이상한 관념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보니 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시도 상상의 산물이고, 어떤 삶의 한 조각이 부딪치는 것이기도 한데, 늘 '다운 것'의 틀에 얽매어 이것을 쓰면 맞나 안 맞나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시는 제일 못쓰는 글이 되어 버렸다.

시의 간결함에서 쿵하고 받는 그 한 줄 때문에 좋아하고 시집 모으기가 취미였지만, 내가 쓴 시는 냉동고에 오래 저장해두는 것이었다.


그때 백일장이 끝나고 선생님과 걸어오면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앞으로도 그냥 네가 쓰고 싶은 대로 써라.'

선생님다운 말씀이셨다. 선생님의 지도 방식은 글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써가지고 가면 그냥 읽어보고 거두절미하고 '마음에 안 드니 다시 써와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통과되었다고 하면 선생님과 둘이 교문을 나선 것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울리고, 그 도시에서 제일 부자학교였던 시내 한 복판의 성호 국민학교 어두운 마당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 도시의 제일 변두리 학교서 온 아이가 그런 시를 쓸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직도 사람들은 시를 보면서 실재화시킨다.


그러나 소설처럼 시는 시다. 삶의 단면이 포함되다 보니 시를 마치 인화된 사진처럼 보듯 한다.

그러나 오숙자 선생님의 '마음 가는 대로 써라'는 것에는 시를 쓴 사람의 생각을 담지만, 그 이상을 잘 관찰하고 끌어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날 심사위원들은 시는 곧 그 아이다로 보았다. 그러니 아이의 경험치를 넘어선 사물과 사람의 죽음에 대한 내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브런치를 하다가 시쓰는 능력이 모자란데도 격려해주시는 분을 만나니 행여나 하고 쓰게 된다. 마치 그 예전 국민학교에서 글짓기를 가르쳐주시던 오숙자 선생님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선생님이 '통과'할 때까지 쓰기만 하던 글짓기 시간이 추억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시에 대한 두려움도 점점 사라지려고 한다. 한번 걸린 병처럼 시에 대한 주눅이 아직도 들어있지만 그래도 차차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냉동고에 넣어두었던 것을 오래 해동시켜보는 중이다. 시간이 좀 걸린다. 오래 딱딱해져서.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 쓰기 이후 독서법이 바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