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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초록을 좋아하던 내가 빨강을 사랑하게 된 계절

by 정린

어릴 적 나는 빨간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눈에 띄었고,
분홍이나 붉은빛으로 도배된 여자아이들의 옷과 가방, 머리핀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세계 같았다.

나는 초록을 좋아했다.
이유 없이, 그냥 초록이 좋았다.
그림을 그릴 때면 꼭 초록을 집어넣었고,
초록이 빠진 풍경은 어딘가 어색하고 조화롭지 않아 보였다.
도시에서 자랐지만,
어쩌면 자연을 향한 본능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봄밤


얼마 전, 밀라논나의 유튜브에서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라는 영상을 봤다.
논나는 ‘절대’라는 말을 조심하게 됐다고 했다.
살다 보면 생각이 바뀌는 순간들이 있으니까.

나도 그렇다.
꽃은 예쁘지만 무용한 선물이라 여겼고,
빨간색을 좋아하게 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꽃은 여전히 비싸고,
생화를 자주 사기엔 넉넉하진 않지만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길가의 꽃 앞에서
나는 자주 멈춰 선다.
어쩌다 길가에 떨어진 꽃송이를 보면
괜히 마음이 쓰여 조심히 주워 온다.
그리고 작은 유리잔에 담아두곤 한다.

요즘, 동네는 들장미의 계절이다.
초록 나무들 사이, 무채색 건물 틈마다
빨간 장미가 불쑥불쑥 피어난다.
활력과 생기, 그 자체다.
그 당당함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나, 여왕 장미야.
안 보고 지나칠 수 있겠어?”
장미가 내게 말을 건다.

나는 사과한다. 들장미에게.
빨간색의 매력을 몰랐던 걸.
꽃집 진열대의 반듯하고, 세련된 빛깔의 장미만
예쁜 줄 알았던 것도.

제멋대로 피어난 들장미의 거친 화려함은
오래된 골목의 주름진 벽에
빨간 립스틱을 칠하고,
붉은 머플러를 곱게 둘러준 것 같다.

참 좋은 계절이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그런 계절.
나도 조금 더 다정해지고 싶은 계절이다.

"나, 여왕 장미야"(25.5.11)



다정하게, 월요일 추가발행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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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취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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