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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Jan 03. 2024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정재찬은 교실에서 죽어가는 시를 안타까워하고, 팍팍한 삶에 지쳐 시를 떠올리지 못하는 세상에 굳은 심장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다시 뛰게 하려 애쓰니, 심장 전문의 역할을 하는 교수다.     


   시는 나이가 많고 적음,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동시로 만나고, 먼저 다녀간 이는 시조를 지었고, 감성을 자극하는 서정시는 계절과 인생과 연애를 소재로 쓰고, 서사시로 이야기를 담아둔다. 시험을 대비하거나 사랑의 시초랄 수 있는 설렘은 시 한 편 정도는 찾거나 외우는 추억을 만들었다. 

   저마다 다른 까닭을 핑계로 시는 시인의 몫일뿐 나와 연관도는 0에 수렴해 왔다. 연애 시절 시집을 선물한 이후로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새겨진 시를 읽거나, 유행가 가사에서 시를 듣고, 시인이 보내준 시집을 휙 훑어보거나, 폭넓은 독서에 구색을 갖추려 시집을 사들였다. 이백 시선, 루미시초, 김수영 전집 1(시), 2(산문)가 그러하고 특히 김수영 전집을 산 것에 후회한다. 살아온 시대가 다르니 저항시는 감흥이 크지 않더라.

다행히 『시를 어루만지다』, 『감성의 끝에 서라』는 시를 짓는 시작점에 관한 글이라서 심장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굳은 심장 여기저기에 따뜻한 기운을 보태기에 충분하다. 몇 번 더 읽는다면 다시 뛰게 할 것이다.     


   연예계, 스포츠계에서 쓰는 스타라는 표현은 인간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욕구이니, 매슬로가 말하는 자기실현의 욕구와 존경의 욕구가 가진 위상이 바르다고 할 수 없지 싶다. “스타가 스타인 것은 많은 이가 우러러보아서가 아니다. 저 한 몸으로 많은 이를 비춰 주기 때문에 스타이다.”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과 결별이 함께해야 생명이 있는”이란 글로 인간의 성숙에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금세 아무는 상처는 사랑이 아니었음을 방증하는 증거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이라는 노래가 있으니 사랑에는 적당한 아픔이 있어야 어울리나 보다. 


   감동은 진실에서 오니 기교로 오게 할 수 없다. “때로 가난은 우리를 진실한 삶과 사랑을 만나게 해 준다.” 무관심은 마음이 가난한 것이다. “공감의 능력이 사라진 사회는 죽인지도 모르고 있는 죽은 사회다.” 슬픔에 공감하는 일이 사회를 살라는 일이다. “설에 라면만 먹는 사람을 보고 맛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직도 맛으로만 먹는 사람은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게다.” 일부러 눈길을 마주치길 피해온 사람들, 내심 불안해하기도 하며 가까이하기를 저어했던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일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희망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라는 저자의 눈은 맑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어도 어둠이 빛을 몰아낼 수 없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이런 표현은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에 있다. 짧으면 기다림이 아니다. 기다림은 기다랗다. 소망이 있는 한, 기다린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유치환의 <행복> 마지막은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는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헌시’다

   “늙은 낱말들”이란 표현에 공감한다. 수십 명이 함께하는 단체 카톡방에 나만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문장을 쓰지 않고, 새해가 되면 희망찬 새해가 되기 바란다고 쓰지 않아 동료와 어울리지 못한다고 평가받기를 감수한다. 늙은 낱말이 아니라 죽은 낱말을 나열하기에 동참하지 않는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나그네의 방황’과 ‘소풍’을 견주는 글은 이해하나 ‘사이’와 ‘차이’의 구별을 위해서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다시 읽어야 한다. 심장 전문의의 처치로 내 굳은 심장이 다 살아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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