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 불가능'에게로 달려가 '가능'에 대해 물을 것이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어느 기차역, 노숙자는 낡은 시집을 읽으며 기차가 들어오고 나가면 무심코 눈길을 주었다. 나는 염치 불구하고 시집 제목을 훔쳐보았다. <불가능에게로>
시인의 이름은 너무 희미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기차는 철로에 앉은 비둘기들을 몰아내며 들어왔고 비둘기들은 도시의 눅눅한 하늘로 흩어졌으며 나는 기차를 탔다. 차창 너머로 보랏빛 시집 제목이 보였다. 내 목적지인 것 같았다. " - 허수경 -
기차를 탈 때마다 습관처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라는 허수경의 시집을 가방에 넣는다. 딱히 그 시집의 내용이 나에게 공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이유를 들자면 시집의 제목 때문이다. 오래전 언젠가 시골 간이역 기찻길을 친구랑 하염없이 걸었던 기억이 난다. 무슨 특별한 의도를 품고 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쭉 이어진 기찻길을 따라 무작정 걸어보고 싶었다. 기찻길의 끝은 끝이 없었다. 더 이상 걷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 때는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돌아갈 일이 아득하고 막막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 그냥 막연히 기찻길을 따라왔을 뿐인데. 어둑어둑해지는 철길은 왜 그리도 스산해 보이던지. 해 질 녘 바람은 왜 그리 차갑게 느껴지던지. 발바닥은 왜 그리도 아프던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이 되어버린 텅 빈 역사. 이름 없는 풀들만 무성했던 그 스산했던 풍경을 떠올려본다. 흔들렸던 시간들의 기억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중략
왜 나는 너에게 그 사이 아무 기별을 넣지 못했을까?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
누구에게든
누구를 위해서든
하지만
무언가, 언젠가, 있던 자리라는 건, 정말 고요한 연 같구나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어주니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 중략
/ 빙하기의 역 부분 발췌/ 허수경
오랜 시간이 지니고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빙하기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일지 모른다.
빙하기의 만남은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해서 가능한 일이다.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을 통과한다. 어딘가 있을 우리 삶의 목적지를 향해서....저마다 스쳐 지나가며 아득히 멀어진 빙하기의 시간을 더듬는다.
가끔 기차라는 교통수단에 대해 생각해본다. 멈추는 역마다 서로 모르는 이들이 타고 내린다. 기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앞모습과 기차에서 내려 출구로 빠르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기차 타는 재미의 일부다. 서로 모르는 이가 옆자리에 앉아 1시간여 동행이 되기도 한다. 낯선 이들은 간혹 팔꿈치나 어깨가 스치기도 한다. 옆자리의 누군가가 펼쳐놓은 책을 슬쩍 쳐다보기도 한다. 같은 칸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일, 나와 전혀 상관없는 남들의 소곤거리는 대화에 귀 쫑긋거리며 듣는 일도.
기차를 타고 멀어지는 풍경과 다가오는 풍경을 동시에 바라보는 일은 재미있다. 빠르게 뒷걸음질 치는 풍경들. 터널 속에서 뒤섞이는 불빛들. 기차가 지나는 역마다 그 도시 특유의 냄새가 난다. 들고 나는 사람들에게서 그 도시의 냄새가 난다. 그들의 말투에도 옷차림에도 그들이 살아온 도시의 냄새가 묻어있다. 기차는 그 모든 공간들을 같은 시간 안에 품고 달린다. 불특정 다수가 같은 혹은 서로 다른 목적지를 향해서 덜컹거리며 간다.
나는 가끔 삶을 교통수단에 비유하자면 기차가 적격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어떤 사람과 동행이 될지, 어떤 풍경을 보게 될지. 기차를 타고 달리는 인생. 다가올 풍경을 모르기 때문에 삶의 순간순간이 목적 이어야 한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 호사스러운 역이 아닌 폐쇄된 역, 간이역.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고 싶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열차만이 멈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기억으로 자신만의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시인이 우연히 훔쳐본 보랏빛 표지의 제목처럼 ‘불가능에게로’ 가는 열차. 그 열차를 기다리고 싶다. 불가능에게로 가는 열차.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열차를 타고 불가능에게로 가는 일, 어쩌면 그 일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불가능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것은 묻고 싶은 게 많아서다. 불가능에게 달려가 가능한 일들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다.
우리 삶의 종착역이 불가능이라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 매일매일 ‘불가능’을 ‘가능’이라 우기며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가능한 것들을 꿈꾸며 현실의 불가능들을 움켜쥔 채 그럭저럭 견디면서.....
불가능에게로 갈 것이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열차를 타고 '불가능'에게로 달려가 ‘가능’에 대해 물을 것이다.
그리하면 언젠가는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어쩌면 우리는 아이처럼 오랫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불가능'에게로 가서 '가능'에 대해 묻는다면 말이다..... /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