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 내리는 12월 첫날, 나는 무언가를 빼앗는 듯

질척거리는 물이면서 녹는 눈 조각들을 두려워했다

어젯밤 창틈을 파고드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더니 12월 첫날.... 진눈깨비가 내렸다.

12월. 달력을 넘기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벼워진 달력, 무거워진 마음.

거기에 매서운 바람과 눈도 비도 아닌 진눈깨비가 내린다.

진눈깨비가 내린다. 진눈깨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던 용어 ‘진눈깨비’.....

입으로 소리 내어 보니 정말 특이한 느낌을 준다.

진. 눈. 깨. 비......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닌 어떤 것, '눈비'라고 불러야 할지, '비 눈'이라고 불러야 할지.


눈비도 아니고 비 눈도 아닌 ‘진눈깨비’의 어원이 궁금해진다

진눈깨비의 의미와 어원은 한국어의 조상어라 할 수 있는 르완다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아리랑 역사와 한국어의 기원』이라는 책에 따르면

진눈깨비’는 르완다어 <cura (to deprive others) + enda + nyura (to satisfy)의 과거형 nyuze + nyara (to make water) + gabura (to distribute)의 과거형 gabuye>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무엇을 빼앗는 듯이 질척거리는 물로 녹는 눈의 나눠진 조각’을 뜻한다고 수록되어있다.

“무엇을 빼앗는 듯이 질척거리는 물로 녹는 눈의 나눠진 조각”.

무엇을 빼앗듯이 내리는 것일까. 진눈깨비가 빼앗고자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사람의 마음을, 시간을, 계절을, 초조함을, 희망을.......

빼앗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진눈깨비가 내리면 마음이 스산해진다는 것.

우산을 쓰고 걷다 보면 눈처럼 느껴지고 눈인가 싶어 우산 없이 걷다 보면 비에 젖는다

비도 눈도 아닌 것.

명확하지 않은 것.

나는 모호한 것들, 명확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칼로 자르듯 명확하지 않다. 생각해보면 눈인 듯도 싶고 비인 듯도 싶은 것이 세상일이었다. 내가 바라는 대로가 아닌.... 그리 생각하면 참으로 많은 진눈깨비를 맞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학적 의미의 ‘진눈깨비’는

대략 5㎜ 이하의 지름을 갖고, 빗방울이나 거의 녹은 눈송이가 동결되어 만들어지는데 따뜻한 공기층이 지면과 접한 빙점 이하의 찬 공기층 위에 놓일 때 주로 형성된다고 한다.

지름이 더 큰 것은 우박이라고 부른다니... 과학적 의미에서 진눈깨비와 우박은 성분의 차이보다는 크기의 차이다. 그리 생각하면 진눈깨비는 우박이 되지 못한 미완의 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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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눈깨비 >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 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치는 혼령들이

안갯속에서 안개가 흩날리네

어둠 앞에서 어둠이 흩날리네

그 어둠 허공에서

떠도는 피 한 점 떠도는 살 한 점

주워 던지는 여기

한 떠남이 또 한 떠남을

흐느끼는 여기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그대여

어두운 세상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

강은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첫눈이 내린 12월 첫날. 눈이라기보다는 진눈깨비가 내린 도로.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차들. 도시의 어둠 속을 질주한다.

눈도 비도 아닌 것. 무언가를 빼앗는 듯이 내리는 진눈깨비 속을 달리며

나는 무언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마음이 조급해진다.

겨울이 두려워지는 것은..... 아마도 이런 조급함 때문이 아닐까?

적설량으로는 기록될 수 없는 수치였지만

오늘 이곳에 공식적으로 첫눈이 내렸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진눈깨비”가 내렸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무엇을 빼앗는 듯이 질척거리는 물로 녹는 눈의 나눠진 조각’들이 회색도시 위로 쏟아져 내렸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 겨울의 첫 발자국 소리가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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