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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준성 Dec 13. 2018

ep1. 독립은 신의 한 수

#두려움과 설렘 그 어디쯤

26살 겨울

2호선 낙성대 입구역에서 언덕을 10분쯤 올라가면 도착할 수 있는 작은 원룸은 나의 초라하지만 멋진 첫 보금자리였다. 부모님의 손을 벗어나 처음으로 독립한 그곳이 비록 5평 남짓의 작은 방일지라도 나만이 들어갈 수 있고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 생긴다는 건 흥분되는 일이었다.


 나는 동굴을 처음 발견한 구석기 원시인처럼 들떠있었고, 신기하며 두려운 그 기묘한 감정에 뒤섞인 채 침대에 누워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Fly me to the moon을 자주 들었다. 나도 달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붕떠있었고, 독립을 자축하는 의미로 현찰박치기 한 아이맥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와 함께 매일 잠들었다. 

난 음악과 전혀 관련이 없는 방사선과를 들어간 20살 때부터 아니, 그 대학을 들어가기 전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이 하고 싶었다. 슈퍼스타를 꿈꾸는 사람은 아니었고, 그저 감정의 배설구가 필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출퇴근 시간이 아까워 독립을 주장한 이면에는 시간을 절약해서 음악에 매진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강북 토박이로 살아온 내가 강남의 한 유명 병원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왕복 3시간이라는 출퇴근 시간이 너무도 아까워서 주장한 독립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립을 주장했을 때 아버지는 쿨하게 외동아들의 궐기를 허락한듯했지만 그때를 회상해 보면 아버지는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로봇 같았다. 


머리로는 이해하시는 듯했지만, 입으로는 끊임없이 나의 의지를 시험하셨다. 그나마 진보적인 어머니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독립이었다. 2년 안에 부모님께 빌린 전세금을 다 갚는다는 약속으로 얻은 전리품이 최신형 아이맥과 5평 남짓 원룸이었다. 난 그때 지금보다 훨씬 어렸지만 퉁명스러운 아버지의 태도에서 아들을 향한 걱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26살의 독립과 현재의 유부남 신분 사이에는 정말 무수히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직업을 몇 번이나 갈아 치웠고 그 과정에서 나는 늘 도전과 실패를 맛봐야 했으며, 그나마 가끔 찾아오는 성취감에 이끌려 여러 일들을 꾸미는 것이 생활화되었다. 보험금 청구금을 산정하는 손해사정인도 해보고, 1인 기획사를 설립하고, 음악을 하는 좋은 동료들과 크루를 만들고, KT 뮤직과 계약도 하고 음반도 발매했었다. 심지어 난 사채업도 해봤고, 현재 MENSA 회원이다. (아마 전국에서 가장 똑똑한 사채업자였을 것이다.)


모든 일들이 마치 필름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흘러가는 도중에는 나도 내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는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하나의 경험을 시작하고 끝맺음할 때마다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는다는 것이다. 그 자신감은 낙성대 원룸에서 시작되었으며, 독립은 지금의 나를 만든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무언가를 주저하고 있다면 일단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일을 한다고 해서 천지가 개벽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물론 실패할 확률이 성공할 확률보다 월등히 높을 것이다. 누구나 처음은 있고, 경험해봐야 어떻게 성공하는지 알게 된다. 이제는 확신한다. 때로는 아주 낯선 곳에 혼자 우둑하니 서있어도 나쁘지 않다는 걸. 난 얼마 전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걱정을 한다고 걱정이 사라지면 걱정이 없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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