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않게, 텃밭에 장화를 심었습니다.
처음 겪는 장마 속 텃밭
장마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싶은 걸까요? 한동안 서운할 만큼 모습을 안 보이던 비가 쉴 새 없이 내렸습니다. 갈증에 허덕이던 작물들이 물을 원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좋았고, 저도 물을 일일이 퍼 나르며 농작물에 물 주기를 안 해도 돼서 좋기도 했습니다. 장마로 인한 안 좋은 뉴스들이 속속 들리지만, 왠지 저는 이번 장마가 그렇게 밉지만은 않더군요.
어김없이 주말은 찾아왔고, 저는 딸아이와 수분을 보충하기 위한 물과 우유, 그리고 밭에 갈 때마다 들고 가는 텃밭 준비물을 가지고 텃밭으로 향했습니다. 전날에는 비가 오지 않았지만, 일주일 동안 거의 쉬지 않고 내린 비 덕분에 분명히 텃밭 작물들은 눈에 띄게 많이 컸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텃밭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생일 선물을 풀기 전처럼 설레었죠. 역시나 도착하고 멀리서 본 텃밭의 느낌은 '초록' 그 자체였습니다. 비가 와서 일주일 만에 온 제게 옥수수는 급성장한 키를 뽐내었고, 얼마 전 가지치기를 해준 참외는 그사이 추가로 폭풍 성장하며 옆 고랑에 있는 이웃 식물들 위로 뻗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예상치 않게, 텃밭에 장화를 심었습니다
밭을 가볍게 훑어보고 난 후, 텃밭에 물 주기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서 일단은 물을 길어 와야 했습니다. 장마로 많은 물을 먹은 농작물이었지만, 딸아이의 고사리손으로 조금씩 물을 더 줘도 상관없을 것 같더군요. 일단은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해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에, 물을 퍼서 밭으로 나르던 중에 사건이 터졌습니다.
"엄마...! 도와줘!"
반은 울음, 반은 절박함이 섞인 아이의 목소리였습니다. 바로 제 뒤에서 따라오던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저도 덩달아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아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엄마 없이 옆 고랑으로 들어갔고, 몇 걸음 못 가서 철퍽 넘어져 있었습니다. 얼핏 보니, 텃밭의 흙들이 장맛비를 맡고 진흙처럼 변해 발이 푹푹 빠지는 상태였죠. 미처 그 부분을 체크하지 못한 초보 텃밭 지기인 저는 놀라, 말을 잃었고요. 울고 있던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너무 어이없이 벌어진 그 상황이 한편으로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딸을 구하기 위해, 저 역시 장화 신은 발을 진흙 속으로 용감히 담갔습니다. 누가 그랬던가요.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기 위해 물에 들어가면 둘 다 죽는다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텃밭 진흙은 저희가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비웃듯 더 깊이 끌어당겼습니다. 물도 아닌, 겨우 밭인데 뭐 괜찮겠지라는 덤덤한 마음으로 들어간 저는, 솔직히 어느 순간부터는 약간의 공포감에도 휩싸였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아이의 장화를 포기하고 일단 아이를 들어서 밖으로 던지다시피 멀리 보내고, 저는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서 왔던 길을 기어서 돌아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텃밭에서 할 일을 모두 뒤로한 채, 꼭 따가야 하는 식자재들만 몇 개 따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계획대로 전혀 흘러가지도 않았고, 옷과 신발, 몸까지 모두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저는 계속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엉뚱하게 흙 속에 빠져 도와달라고 울던 아이의 얼굴이 한동안 잊히지 않았고, 아이를 구하려다가 함께 빠져서 엉망이 된 제 모습도 생각할수록 웃음이 났더라고요. 이렇게 아이와 나 둘만의 추억이 또 하나 쌓여가는구나 싶어, 사실 행복했습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던데. 이건 땅이 굳기는커녕, 겉만 땅이고 속은 음흉한 물로 가득했습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을 바꿔야 할 것 같네요.
비 온 뒤 땅이 굳는다.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도 사실 그렇죠. 힘든 시련의 비를 맞고 나서,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사람들은 시간이라는 약을 먹으며, 하루하루 상처를 치료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보살펴야, 나중에는 시련의 비를 맞기 전보다 더 강해져서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 같고요. 앞으로는 오늘 일을 생각하며, 힘든 일이 있으면 마음의 땅이 단단히 굳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나에게 꼭 줘야겠다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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