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크 플레이스 차우더의 클램 차우더와 크랩 롤
전날 6일간의 서부 로키 밴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는 삼촌 숙모댁에서 짧게 쉬고, 다음날 캐나다에서 국경을 넘어 미국을 향한 1박 2일 여행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이가 있는 가족과 함께. 총 다섯 명이 가는 짧은 여행이다.
지인이 사는 랭리로 이동해 한 차를 타고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근처 맛있는 샌드위치 집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출발한다. 점심 먹을 즈음에는 도착할 수 있겠지 기대하며.
밴쿠버에서 2시간 30분 정도면 시애틀에 도착할 수 있다고 얼핏 들었는데 실제로는 3시간~4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나가는 국경이 근처에 크게 두 종류가 있었는데, 우리가 조금 돌아서 사람이 덜 붐비는 국경을 택했던 것 같다.
캐나다에서 미국은 차를 타고 왔다갔다 할 수 있고, 캐나다인의 경우에는 따로 비자나 ESTA를 받지 않아도 통행을 할 수 있어 미국 여행이 가깝고 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국인인 나의 경우는 미리 ESTA를 꼭 신청해 두어야 한다. ESTA발급까지 얼마 걸릴지 알 수 없으므로, 같이 시애틀 여행을 가자고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바로 ESTA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해서 신청 절차를 완료하고 결제도 해 두었다.
이 국경에서 그냥 보내줄수도, 따로 조사를 할 수도 있는 것 같았다. 멈춰서 뭔가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할지 궁금했고 괜히 조금 걱정도 되었는데, 우리 차례에서 저쪽에 차를 대고 건물 안에 들어가서 조사를 제대로 받으라는 안내를 받았다. 무표정한 말투로 조사를 받으라는 말을 들으니 괜시리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잘못한 건 한 개도 없는데 말이다.
차를 잘 대고 건물에 들어가서 우리 여권을 다 제출했다. 원래도 무섭다거나 카리스마있어보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한껏 힘을 주어(?) 더더욱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방한 아시안으로 보이도록 행동하며(?) 절차가 잘 끝나길 기다렸다. 다소 이상한 조합의 우리를 보고 서로 무슨 관계냐고 물었고 이렇게 이렇게는 친구, 이렇게 이렇게는 서로의 와이프, 이 아이는 자식이라고 이야기하고, 생각보다는 덜 딱딱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잘 마치고 무사통과했다.
후! 저 절차가 뭐라고 그렇게 긴장이 되던지. 이제부터는 미국 땅이다. 솔직히 눈에 띄는 차이를 표현할 수는 없지만 미묘하게 간판 스타일도 다르고 건물도 다른 것 같고. 이제는 하늘과 물마저 다른 기분이다. 미국 땅을 밟는 기쁨은 잠시 제쳐두고 급한 일들을 먼저 해 보기로 한다.
일단 미국에서도 인터넷을 끊김없이 쓰기 위해 캐나다 이심에서 미국 이심으로 교체작업을 빨리 시작한다! 그래야 맛집 검색을 계속 할 수 있으니까.
나의 경우에는 캐나다에 올 때 Airalo(에어알로) 라는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고 캐나다 이심을 구입했다. 캐나다에 사는 이 부부도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가서 미국 이심을 추가로 구매하고 미국 땅에 와서 설치를 했다. 그러면 거의 모든 것이 끝났다. 설정을 미국 이심으로 바꾸면? 너무 간편하게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었다.
불쌍한 남편은 eSIM이 지원되지 않는 휴대폰이라서 이번 캐나다 여행은 그냥 캐나다 유심 그대로 들고 와 보기로 했다. 우리가 구매한 유심이 미국에 가도 로밍이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이 이래서 여행기는 재깍재깍 써야 하나 보다.
인터넷이 잘 되면 이제 얼른 맛집을 검색할 시간. 필요하면 예약도 얼른 해야겠지. 핑크 도어라는 가게가 평이 꽤 좋고 가격도 괜찮은 편이길래 얼른 예약을 시도했다. 다행히 우리가 가는 날 애매한 시간이지만 자리가 있어서 예약을 완료했다.
사실 시애틀 하면 클램 차우더가 대표격이다. '파이크 플레이스 차우더'라는 가게에 가서 클램 차우더도 먹어보기로 했다. 점심을 다른 가게에 예약해 버려서 맛을 못 볼 수도 있었는데, 도착하고 핑크 도어에서 밥 먹기까지 시간이 좀 남으니 그 때 아주 조금이라도 사서 맛을 보기로 결정했다. 두 남자는 굳이 그렇게까지 클램 차우더를 먹어야 할까, 그냥 다른데 구경하다가 바로 밥 먹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을 지도 모르지만, 두 여인들이 당연히 그래야 할 것 처럼 이야기를 하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기에 입밖으로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생각보다 시애틀이 참 멀다고 생각할 즈음, 오른쪽으로 시애틀의 랜드마크가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애틀이다! 시애틀 온다고 해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영화를 보고 와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당연하게도 안 보고 온 게 조금 아쉽긴 했다.
목적지 부근 도착!
정확히 설명은 못하지만 정말 캐나다와 미국은 건물부터 뭔가 느낌이 다르고 바이브도 다르다. 이 부근에서 주차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마켓 주차장은 일단 만차였다. (이 이후에 갔을 때도 항상 만차였다. 자리가 너무 적어서) 일단 우리를 근처에 먼저 내려주고 지인분께서 주차장을 찾아봐주시기로 하셨다.
요 언덕을 내려가서 왼쪽으로 가면 클램 차우더 집, 오른쪽으로 가면 핑크 도어, 그대로 쭉 내려가면 퍼블릭 마켓이 있다.
우리는 당연히 왼쪽! 클램차우더 가게로 향한다.
와.
점심시간이 지난 2시 부근이었는데도 줄이 많이 있었고 가게도 만석이었다. 오죽 사람이 항상 많으면 오른쪽에서 버스킹 하는 분도 계셨다. 노래 들으면서 대기하는 것, 제법 낭만이다.
곧 밥 먹을 건데 너무 욕심부리는 건가. 먹을 게 이리도 중한가. 조금은 스스로를 검열하는 마음이 피어올랐지만 다행히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여인이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과 나는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면 행그리(hangry)상태가 되니 좋지 않다. 대신 이따 밥 먹을 거니까 아주 조금만 주문해서 맛만 보기로 했다. 클램 차우더를 주문하면 빵도 같이 준다고 하니 빵과 같이 먹어볼 셈이다. 나는 지난번 화이트 록에서 클램 차우더를 먹어본 게 전부다. 맛있는 조개 크림스프.
줄이 많이 줄어들었다. 이제 가게 내부가 보인다.
우리 뒤에 또 줄이 많이 생겼다.
너무 당연한 소리이지만 정말 메뉴판이 미국스럽다.
뉴잉글랜드 클램 차우더를 먹어보기로 했다. 오른 쪽의 시푸드 롤은 두 조각에 사만 원 정도나 하는 호화로운 롤인데 가격에 비해 후기가 그렇게까지 좋진 않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했지만 먹어보면 먹고 맛 없다고 별로라고 할 수 있지만 안 먹어보면 아예 뭐라고 말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기를 많이 봤는데 던지네스 크랩이 조금 더 후기가 나았던 것 같아서 그걸로 주문해 보았다.
이곳은 원래 가게를 지나 안쪽 깊숙이 있는 포장 전용 픽업 창구이다. 내부에 자리가 없어 우리도 나가서 먹기로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클램 차우더와 롤을 받아서 나왔다.
가게 오른쪽에도 음식을 먹는 자리가 있는데, 우리의 경우는 포장으로 하겠다고 말을 한 경우라서 그곳에서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아, 그냥 먹고 가겠다고 하고 기다릴 걸. 그래도 자리 기다리다가 예약 늦을까 봐 불안해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길 한복판에서 음식을 들고 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고민하던 우리는 가게를 지나쳐 왼쪽으로 좀 걸어가 나선형 계단 아래쪽에 있는 턱을 보았다.
앉아...?
말아...?
지금 장소 따질 때가 아니다 싶어 그 곳에 어색하게 자리 잡고 앉아 얼른 클램 차우더 맛을 보기로 했다. 바로 옆에 분리수거 통이 있어서 분위기는 영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원하던 것을 맛볼 수 있다면 감수해야지!
다소 정신없는 와중이지만 클램 차우더는 뜨끈하고 맛있어 보였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어디 덜어서 먹는 건 언감생심이고 그냥 알아서 잘 퍼먹기로 했다.
한 입 ....
와. 꾸덕꾸덕하고 감칠맛 나고 적절히 짭조름한 맛이 아주 좋았다. 따끈따끈한 맛이 몇 시간 차 타고 온 고생을 조금은 품어주는 기분이었다. 그에게서는 Holy로 시작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굳이 길가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밥 먹기 30분 전에라도 먹어볼 만한 맛이었다. 빵이랑 같이 먹어도 맛이 참 좋았다.
두 조각에 사만 원 넘는 호화로운 크랩 롤. 부부끼리 한 조각씩 먹기로 했다. 달짝지근한 게살의 맛과 빵이 잘 어우러졌다. 솔직히 근데 롤은 후기 쓸 때 주문했는지도 처음엔 기억이 잘 안 났던 걸로 봐서 먹고 기절할 정도로 충격적인 그런 맛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행지에 와서 궁금한 것이 주로 먹을 것인 나로서는, 조금 촉박하고 조금은 어수선하더라도 궁금했던 음식을 놓치지 않고 맛볼 수 있어서 매우 만족스럽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나와 같은 확고한 생각을 가진 친구가 있어 자기 검열을 좀 덜 하고 마음껏 음식을 추구할 수 있어서 감사했고.
클램차우더 맛이 괜찮아서 삼촌 숙모께 좀 사다 드리기로 마음먹고, 내일 기회가 되면 다시 이 부근을 들리자고 이야기했다.
배와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고, 이제 반대편 오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핑크색 문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