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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종훈 Sep 14. 2023

소금꽃

그 이름 한 번 온전히 불리우지 못하고 한 세상 살다 간 모든 어머니들을 추모한다.   

 



몰려드는 졸음 쫓기 위해 차창 열었다가는 닫고 다시 열기 거듭하며 한밤의 고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믐밤이어서인지 달빛조차 없어 보이는 것이라고는 전조등 불빛 비추는 거기까지 만의 검은 도로와 이따금 맞은편에서 쏜살같이 달려와 스치고 지나는 차량의 눈 따가운 불빛뿐이어서 칠흑 같은 어둠도 어둠이지만 적막(寂寞)함이 그보다 더 짙고 깊다.


조금 열어둔 차창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풍절음(風折音)과 낮게 으르렁거리는 엔진 소리가 아니면 그에 잠식(蠶食)당해 대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와 지금 운전하고 있는 사람이 나 자신인지조차 모를 정도다. 한 시간여의 짧은 조문(弔問) 위해 집에서 한참이나 먼 한 곳의 장례식장까지 세 시간 가까이를 달려왔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나주댁(羅州宅)의 별세(別世) 소식을 향우회(鄕友會) 총무로부터 연락받은 것은 삼월이지만 그때껏 지난겨울의 찬 기운이 여전하게 느껴지던 날의 아침 무렵 집 근처 뒷산 오르고 있을 때였다. 늘 그렇듯 향우회 총무는 친목 도모를 위해 한 해에 두 차례 개최되는 향우회의 일시와 장소, 그리고 한 시절을 한 곳에서 더불어 살았던 사람들의 경조사 소식을 명부에 기재되어 있는 모든 회원들에게 일괄적으로 발송했고 그에 따른 참석여부는 각자 알아서 하라는 취지로 보낸 것이었다.


이십여 년 전 고향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한 노인분의 장례식장에서 만나 가난했으되 참으로 정겨웠던 옛 동네에서의 일들 떠올리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 몇몇 동년배와 선배들이 의기투합하여 회(會)가 결성된 이후 잊을 만하면 한 차례씩 고향 어른 분들의 작고 소식 접했고 그때마다 잠시 고인(故人)의 옛 얼굴 떠올리며 애틋해했을 뿐 직접 조문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나주댁, 그녀의 부음(訃音)을 접했을 때 잠깐의 애틋함과는 달리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까닭 모를 먹먹함이 치밀어 올라 오르던 걸음 멈추고 근처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마음 달래야 했었다. 친인척도 아니고 설령 그 어떤 각별한 인연이 있었더라도 이미 강산이 몇 차례나 바뀐 까마득한 저 편의 일인, 그리하여 한낱 동네 어른일 뿐인 그녀의 별세소식에 그런 심사가 되던 것에 스스로도 의아했지만 생각 거듭한 끝에 비로소 그런 심경을 다소나마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죽음은 내 아는 한 고향에서 타지로 이주해 연락이 두절된 어른들 제외하고 붙박이로 그곳에 살거나 떠났다고 해봐야 고작 손바닥 만 한 읍내로 옮겨간 고향 어른의 마지막 죽음이었다. 그로써 한 세대가 완전히 종언(終焉) 고하고 다음 세대인 내가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는데서 오는 비감(悲感)함과 함께 나 자신이 나이 든 것은 생각지 않고 세월이 참으로 빠르게 흘렀구나는 것을 절감하게 되던 것이었다.


나주댁 그녀는 내 기억나지 않는 때에 내 살던 동네로 시집을 왔고 내 어느 정도 사리분별을 할 수 있었을 나이부터는 새댁아지매로 불렀던, 어린 눈에도 참으로 고와 보이던 여인이었다. 윗대 어른으로서는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어려 부모 세대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누님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해 내 스물 중반에 직장 얻어 완전히 동네 떠날 때까지 호칭은 새댁아지매였다.


그녀는 어떤 연유로 그 먼 남도(南道)에서 경상도 내륙의 한 작은 마을로 오게 된 것일까?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머리 늘 감싸고 있던 흰 수건과 함께 들던 의문이었다. 그 어떤 내밀한 저간의 사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초혼(初婚)임에도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데다 상처(喪妻)해 전처(前妻) 소생의 어린 남매 딸린 사내에게, 그리하여 애당초부터 고생할 것이 훤히 보이는 자리를 그렇듯 찾아든 것일까는 생각이 들었다.


황소도 저 정도면 혀 빼물고 드러눕고 말지,라는 동네 어른 분들의 안쓰러운 말이 그녀의 고된 삶 요약하는 가장 적확한 표현이었다. 더불어 그것은 그녀의 무능한 남편에 대한 신랄한 비난이기도 했었다. 별칭이 '술도가'였던 그녀의 남편은 멀쩡할 때는 호인(好人)으로 동네 궂은일들 앞장서서 해결하는 일꾼이었지만 술 한 동이 이고 가지는 못해도 마시고는 간다는 호주가(好酒家)였던 탓에 이틀이 멀다 하고 술에 취해 동네를 온통 휘저어놓기 일쑤였다. 그로 하여 생업(生業)인 미장공 일에 소홀해 생계는 온전히 그녀 몫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남편이 선대(先代)로부터 물려받은 동네 뒤편 산자락 제법 넓은 밭을 오래 방치해 묵정밭 된 것을 억척스럽게 일구어 내다 팔 야채 등속 재배한 것도 그녀였고 고된 밭일 틈틈이 돈이 될 만한 일이면 가리지 않고 품을 팔았으며 호미자루 내려놓아야 하는 농한기(農閑期)에는 읍내 목욕탕으로 출근해 세신(洗身)과 욕탕 청소 도맡아 한 그녀의 각고의 노력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유독 나를 살갑게 대해주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추측컨대 그것은 젊었던 한 시절의 어머니가 그녀가 떠나온 동네 가까운 곳에 십여 년 동안 살았던 적이 있었던 인연으로 동네의 다른 아주머니들과는 달리 어머니를 형님이라 부르며 몹시도 따랐던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수가 적어 속내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그녀가 이따금 마음 온통 방기(放棄)한 채 흐느껴 울던 것도 어머니 앞에서였다. 어머니와의 그런 관계로 하릴없이 떠맡아야 했던 자식과 자신이 낳은 자식이 있었음에도 나를 그들 못지않게 살뜰하게 챙겨주던 것이었다.


그런 끈끈한 관계가 내가 남쪽 끝 항구도시에 직장을 얻어 동네 떠난 이후에도 변치 않고 계속 이어졌던 것인지 오 년여 전 어머니가 별세하셨을 때 그녀는 잠깐의 조문이 아니라 장례식 내내 자리를 지키며 섧게도 울어 모르는 누군가가 봤으면 혈친(血親)이라고 여겼을 정도였다.


그녀의 부음 전해 들은 그날 그렇듯 돈독한 관계였지만 처음에는 이전의 윗분들처럼 직접 조문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명복(冥福) 빌고 향우회 총무 통해 약간의 부의(賻儀)만 전달하려고 했었다. 그간 세월이 많이 흘렀던 데다 장례식장이 너무 멀어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그녀가 내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향에 그대로 살아서 장례식을 그곳에서 치른다면 찾아가 조문할 수도 있으려니 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오래전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었다. 생전의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그녀는 입버릇처럼 훗날 지긋지긋한 굴레 훌훌 벗고 나면 한 마리 나비로 흰 배꽃 사무치게 그리운 고향으로 훨훨 날아 돌아가겠다고 했던 것을 그예 행동으로 옮긴 것이었다.


그날 산에서 내려와 오후 늦게까지 망설이다 조문을 가기로 작정하고 옷을 차려입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는 밤 운전이니 모쪼록 조심하라며 염려의 말을 했지만 얼굴에는 대체 얼마나 친밀했던 사이였기에 그 먼 곳까지 가겠다는 것이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아내에게 굳이 연유 말하는 것이 구차해 별 말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거리를, 그리고 세월에 닳아 희미해진 기억을 핑계 삼아 지난날의 인연을 무심하게 지나쳐버리지 않는 것이고 더불어 한 생애 이 악물고 버텨낸 한 여인의 삶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일이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마지막 윗대인 그녀의 죽음으로 한 세대가 마침내 막을 내렸다는 것과 그간 조문하지 못했던 동네 어른 분들 함께 추모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에의 조문은 지난날 옛 동네에서의 아련하고 애틋했던 추억(追憶)에의 조문이기도 한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던 것일까?

 

무심코 차창 통해 올려다본 밤하늘에 온통 소금 흩뿌려놓은 듯 하얗게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 봤을 뿐인데 느닷없이 가슴이 홧홧해지고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은.

나이 지긋해 그간 이런저런 세사(世事)들 겪을 만큼 겪어 웬만한 일에 마음 동할 일 없어 눈물샘 말라버렸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뭇별들이 가시밭길 같았을 삶을 기어이 감내(堪耐)하고 걸었을 나주댁 같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짜디짠 영혼들이 그렇듯 맑게 빛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꽃은 다름 아닌 소금꽃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여름 대낮의 뙤약볕 아래서도 차마 호미 놓지 못해 양동이째 흘렸을 땀과 어느 한 날 어머니와 이야기 나눌 때 우연히 들은 아침이면 눈 뜨기가 겁나더라는 두려운 고백(告白)이 나주댁 그녀의 평생을 요약(要約)하는 것이라 여겨져 연민(憐愍)의 마음이 일었다.


장례식장에서였다. 평생을 나주댁으로 불리었던 그녀의 이름 비로소 알게 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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