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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무솔 Aug 19. 2023

결혼할 결심

아빠 자격 취득기

길지만 짧았던, 어쩌면 적당했던


 아내와의 만남은 스무 살 때였다. 첫눈에 반한 건 내 쪽이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줄도 모른 채 쫓아다녔고, 아내가 나에게 반할 때쯤 나는 그녀를 떠났다. 그렇게 서로의 스무 살을 실컷 물들이고 자욱만 남았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다시 아내에게 다가갔고, 훌쩍 떠나버린 전력이 있던 나는 몇 개월의 수습과정을 거쳐 마침내 아내와 함께 할 수 있었다.(실로 혹독한 수습생활이었다.)


 연애에 어울리는 기간이 있다면 얼마쯤일까?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그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언제나 큰 임팩트가 있었다. 오전에는 '이런 게 천생연분인가' 하며 감격했다가도, 저녁 즈음엔 '역시 나랑은 정말 안 맞는다'라며 씩씩 거린 날들이 제법 있었다. 2년 가까이 서로의 주파수를 맞춰가던 중, 나는 마침내 긴 취업준비를 마치고 바라던 기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스물아홉 살이었다.


 이미 대학원까지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던 아내에 비해 다소 시작이 늦었던 나는 드디어 당당하고 여유롭게 데이트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한 달가량의 신입사원 연수를 거치고 현업에 배치된 직후에는 마치 정규직 장그래가 된 기분이었고, 든든한 동기들과 자랑스러운 회사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입사원이라 중요한 일을 맡지도 않았기에 '이 정도만 일해도 이렇게 돈을 준다고?' 하며 스스로의 행운에 몸부림치기도 했다.(물론 놀라운 착각이었다.)


 그렇게 회사와의 허니문이 한창일 때, 아내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회생활 놀이에 막 맛을 들인 나에게 결혼은 먼 일로만 느껴졌다. 아직은 적당한 긴장감이 있는 연인 관계가 좋았고, 군인이나 종교인이 아닌 대부분의 친구들은 미혼인 상태였기에 결혼을 당면과제로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안정적인 직장이 생겼다는 것이 연인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2년여간 백수 그 자체였던 남자친구를 만나며 한 여자가 얼마나 많은 불안과 싸워왔는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누구'와 '언제'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운 좋게도 원하던 부서로 재배치되고 나자 회사놀이에 대한 몰입은 점점 심해져 갔다. 자칭 핵심인재인 나에게 연애나 결혼은 당연히 회사의 사이클에 맞춰야 하는 것이었고, 난생처음 해보는 일과 연애의 병행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상태에서 결혼을 서두르는 것은 무리라면 무리였고, 특히 경제적으로도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신혼살림을 꾸리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가끔씩 꺼내는 아내의 결혼 얘기를 앞서서 막거나 미루는 식의 말을 하곤 했다.


 "너랑 결혼하지 그럼 누구랑 결혼하겠어. 근데 지금은 현실적으로 준비가 안 됐잖아."

 "당장 회사 대출을 한도까지 당기더라도 아파트 전세 하나 구하기가 어려운데, 결혼을 어떻게 하니."

 "아니,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한 2, 3년만 있다가 기반 좀 갖추고 하자고."


 주위 친구들이나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비슷한 말들을 들었기에, 나는 더욱더 정당성을 가지고 아내의 말을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인 것처럼 취급했다. 그리곤 아내를 참 좋긴 하지만 현실 감각이 없는 철부지로 격하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깟 취업 좀 했다고 세상 다 아는 것처럼 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확실했고, 점점 사랑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이야기를 꺼내고 어떻게 보면 자존심을 상하면서까지 이야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또 가끔은 아내의 말에 반박하기가 어렵기도 했다.


 "나랑 결혼할 건데 왜 지금 결혼하지 않아?"

 "꼭 번듯한 아파트 아니어도 현실적인 곳에서 시작해도 괜찮아."

 "같이 2, 3년 기반을 다지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잖아."


 몇 번을 비슷한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 순간 비슷한 상황이 오버랩되었다. 십 년 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서로 마음을 나눴지만 그 속도가 맞지 않아 오랜 기간 만나지 못해 돌고 돌아서야 간신히 아내의 마음을 얻었었는데, 지금 또다시 비슷한 상황을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에 순간 아찔함이 느껴졌다.


 2~3년 뒤 우리가 둘 다 결혼할 수 있는 상황이 될 것이란 보장이 있을까? 또 그때에도 서로가 서로로만 결혼하고 싶을까? 아무리 불같은 사랑이라 한들 모든 것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미래를 고민하는 것이 사랑하는 마음을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아내의 말에 알겠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누구와 결혼할지'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언제 결혼할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지금 결혼하고 싶다는 데 이보다 더한 행운과 행복이 있을까? 나는 그 천우의 기회를 잡기로 했다.


내가 잡은 기회의 여신은 아내였다



또 다른 모험을 준비하며


 결혼을 결심한 당시, 나는 아내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안은 아내가 했지만 결심은 내가 했다(?).facebook(2016)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결혼에는 연애와 달리 분명한 '결심'이 필요하다. 발생하지 않은 일에 대한 의지와 기대가 담긴다는 점에서 결심은 매우 낭만적인 수사다. 그런 낭만이 있기에 나와 아내를 비롯한 수많은 부부들이 기꺼이 결혼이라는 모험을 받아들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내의 제안은 너무 현명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물론 현실적인 부분들은 여전히 존재했기에 내가 우려했던 대로 경제적, 환경적으로 많은 고생을 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 불편이 뭐 그리 대수일까. 아내는 계속 사랑스럽고, 동고동락의 데이터들은 서로의 유대를 깊게 해 줄 뿐이다.


 이제 나는 결혼을 망설이는 친구나 지인들을 보면 참지 못하고 꼭 한마디를 하고야 만다.


 "어차피 이 사람과 결혼할 것이란 생각이 들면, 지금 바로 결혼해라. 너무 좋다(핵심)."


 물론 아파트 청약 조건 때문에 혼인신고를 미루는 등 사람마다 처한 상황은 다르고, 섣부른 결혼이 화를 부르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혼할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결혼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기적이라는 점이다. 부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이제 나와 아내는 결혼을 넘어 임신과 출산, 육아라는 미지의 세계로 또 다른 모험을 떠난다. 결혼한 지 꼬박 7년 만의 일이다. 이 모험의 시작으로 결혼부터 육아에 이르는 현실과 생각들을 기록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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