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인시장 트래킹 3 (16.03.11)
향원정과 건청궁을 분주하게 움직이지 않고 그저 한 곳만을 응시하고 싶었기에, 천천히 둘러봤다. 그런데도 시간이 꽤 남아서 몸도 녹이고 시간도 때울 겸 국립민속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는 박물관에 갈 때는 상관없는데 다시 경복궁으로 들어갈 땐 티켓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만나기로 했으면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지만, 문제는 영추문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경복궁의 동쪽 끝이고 만나기로 한 곳은 서쪽 끝이니, 경복궁을 관통하여 가면 훨씬 빨리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으니 궁의 외곽을 따라 영추문까지 가야만 했다.
이때 문제는 두 가지였다. 이미 시간이 25분이었기에 영추문까지 가려면 20분 정도가 걸려 아이들은 벌벌 떨며 나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현세가 지금 경복궁으로 오고 있는데 50분에야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최대한 빨리 걸어 영추문에서 합류하고 중간에 현세가 도착하면 민석이가 데려오는 걸로 하기로 하고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연락이 왔다.
민석: “건빵쌤요. 지금부터 20분 정도 기다려야 하는데, 밖이 너무 춥고 가만히 있으려니 힘이 들어요. 그러니 차라리 쌤이 오시는 길에 현세를 데리고 오시고, 저희는 먼저 통인시장에 가 있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건빵: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그럼 내가 현세를 데리고 갈 테니, 먼저 가서 있어. 그리고 통인시장 돌아다닐 때 사진 좀 많이 찍어주고”
전혀 뜻하지 않았지만, 경복궁에서도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는데, 여기서도 뜻하지 않게 자유시간을 얻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현세가 오는 시간에 맞춰 나도 느긋하게 궁의 외곽을 따라 거닐 수 있었다. 천천히 돌담길을 따라 걸으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더라. 차가 좀 많은 게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덕수궁 돌담길 부럽지 않은 운치가 느껴졌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서울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서울에 자리만 잡으면 서울 전역을 샅샅이 누벼보리라’는 꿈을 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못다 이룬 꿈이 언제나 커 보이듯, 좌절된 꿈이 만든 환상에 불과했다. 막상 꿈이 이루어져 서울에 자리를 잡게 되자, 더 이상 서울을 돌아다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간절함이란 어찌 보면 지금 당장 할 수 없고 앞으로도 기약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에만 쓸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삶에 진정성을 지닌 자세로 ‘지금 이 순간’에 간절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존경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지금 어찌 보면 ‘이 순간’을 약간이나마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돌담길이 나에게 준 선물, 그걸 감사히 받으며 삶의 간절함을 느꼈으니 말이다.
현세는 11시 54분에 도착하여 함께 통인시장까지 걸어갔다. 통인시장은 엽전으로 음식을 살 수 있는 곳이다. 우리도 그 소문을 익히 들어 어제 트래킹 장소를 정할 때 이곳으로 정하게 됐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통인시장이라는 안내판이 걸린 곳으로 들어가니, 길가 양 옆으로 점포들이 늘어서 있다. 여기서 갖가지 음식들을 파는데, 그 앞에 놓인 메뉴판이 색달랐다. ‘통 도시락 카페 가맹점’이라 쓰인 팻말이 놓여 있고, 각 음식 앞엔 가격이 적힌 종이가 있는데, 거기엔 ‘₩1.000 / 엽전 2량’하는 식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건 곧 이곳에선 돈과 엽전 두 가지 화폐가 동시에 통용된다는 얘기이고, 모든 곳에서 엽전으로 음식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며, 가맹점이라 쓰인 곳에서만 음식을 살 수 있다는 얘기이다. 오기 전엔 통인시장에선 모든 곳에서 엽전을 쓸 수 있는 줄만 알았는데, 그런 것만은 아니어서 살짝 실망할 뻔했다.
그곳에서 민석이에게 연락을 하니, 통카페에서 민석이가 나왔다. 그러더니 도시락판과 엽전 10량을 주며 “맨 끝에서부터 오면서 사고 싶은 것을 사는 게 나을 거예요”라는 꿀팁을 준 채 유유히 사라졌다. 이젠 우리가 몸소 부딪혀 가며 음식을 사야만 한다. 나는 음식을 하나하나 보면서 사고 싶었는데 현세는 눈에 띄는 곳마다 들러서 바로 바로 사더라. 그래서 금방 10량의 엽전이 사라져 버렸다. 현세를 통카페로 올려 보내고 나는 천천히 돌아봤다. 부침개, 어묵탕, 밑반찬, 튀김류, 닭강정 등등 많은 음식이 있었고 그 중에서 김밥과 마약김밥, 샐러드, 튀김을 산 후에 통카페로 들어갔다.
통카페 2층엔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그곳에선 밥과 국물, 김치도 살 수가 있다. 시장을 돌아다닐 땐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밥을 먹고 있더라. 그래서 중간 중간 빈자리에 껴서 앉을 수밖에 없었다. 막상 먹기 시작하니 5000원에 산 것치고는 꽤나 푸짐했고 맛까지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튀김류나 김밥류는 만든 지 시간이 좀 흘렀기에 차가웠고, 눅눅하여 좀 그렇더라. 그래서 다음에 다시 온다면, 만들어진 음식을 사기보다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음식을 사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왜 하필 엽전으로 음식을 살 수 있게 한 것일까? 처음 “엽전으로 음식을 사서 먹는대”라는 소리를 들었을 땐,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게 하려고 그렇게 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기획된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이곳에서 음식을 사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돈의 형태가 바뀌고, 가치가 달라진다는 건 착시효과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같은 가치의 돈을 쓰면서도 돈으로 지불할 경우엔 ‘많은 돈을 쓴다’는 생각이 들지만, 엽전으로 지불할 땐 ‘싼데’라는 착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분명히 음식은 샀지만 얼마를 썼는지 모르는 상황이 펼쳐진다. 비유가 과할지는 모르지만, 도박장에서 현금이 아닌 코인을 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칩으로 바꿀 경우 아무리 많은 돈을 쓰더라도 돈을 쓰고 있다는 경계심이 무너져 거의 무한대로 지출하게 된다. 물론 통인시장은 사행성을 요구하거나, 과소비를 부추기는 곳은 아니니, 도박장과 같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엽전이나 코인은 돈에 대한 이미지를 지워 좀 더 활발하게 소비하게 한다는 점에선 같기에 이런 예를 든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선 통인시장에서 가까운 서촌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지도에서 간단히 검색만 해봤을 뿐, 제대로 위치를 알아본 것은 아니기에 헤맬 수밖에 없었다. 조금 걷다 보니, 한옥마을 비슷한 곳이 나오긴 하는데, 그렇게 한옥이 많은 건 아니더라. 그래서 어르신에게 물어봐도 긴가민가하는 반응만 보여주신다.
생각보다 훨씬 별로였기에 두 가지 중 선택해야 했다. 아예 북촌한옥마을 쪽으로 가던지, 사직공원 쪽으로 가던지 말이다. 이건 흡사 ‘인생극장’의 한 장면 같았는데, 결정을 하는 건 오늘의 인솔자인 민석이의 몫이었다. 몇 시간 정도 고민을 했을까, 민석이는 “그래 결심했어! 북촌한옥마을로 고고~”라고 이휘재가 울고 갈 정도로 결연하게 외쳤다. 그 순간 민석이의 모습은 흡사 로사를 할까, 롤을 할까 고민 때리다가 한 순간에 로사를 결정한 듯한 아주 단호한 모습이었다.
정독도서관 옆길을 따라 한옥마을로 간다. 사람이 늘 많은 곳답게 사람들이 넘쳐나고 그에 따라 활기가 넘친다. 중간 중간에 보이는 안내원들이 ‘쉿’이라 쓰인 안내문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이것이 바로 전주한옥마을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북촌한옥마을은 원래 주민들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상업화되지 않은 곳이지만 주변이 관광지여서 유명해진 곳인데 반해, 전주한옥마을은 주거지역이긴 하되 그곳 자체가 급속도로 유명해지며 지금은 주거지보다 상업지가 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래서 여긴 관광객이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둘러 봐도 되지만, 주거하는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조용히 감상하라는 뜻으로 그런 팻말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경우 전주한옥마을은 너무 상업화되어 오히려 한옥마을이 주는 편안함과 여유로움과는 멀어져서 아쉬웠던 차에, 북촌한옥마을에선 그래도 한옥마을다운 모습을 보게 되니 이곳이 더 끌렸다. 그런데 민석이는 “개인적으로 북촌 한옥마을은 전주 한옥마을보다 놀 거리가 좀 부족하달까..? ㅋㅋ 먹거리들도 전주가 조금 더 맛있는 편이고 말이다(민석이의 트래킹 후기보기).”라고 평가하더라. 아무래도 왁자지껄 떠들며 먹고 놀기엔 전주한옥마을이 낫기에 이런 식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럼 이렇게 정리하는 게 나을 거 같다. 북촌한옥마을은 여유와 그윽한 풍취에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며, 전주한옥마을은 젊음을 발산하며 왁자지껄 한바탕 놀 수 있는 곳이라고 말이다.
한옥마을을 모두 돌고 나니 2시가 약간 넘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카페에 들어가 다리를 풀고 차를 마시며 ‘아무 것도 안 할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민석이, 현세, 태기와 나는 한 테이블에 같이 앉았다. 2시면 동네 커피숍들은 꽉꽉 차지만, 이곳은 유명 관광지의 커피숍답게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현세와 태기는 달면서 차가운 음료를 시켰고 나는 뜨거운 카라멜마끼아또를 시켰다. 민석이는 속이 좋지 않은지 시키지 않겠다고 하더라.
그러고 보니 점심을 먹은 이후 민석이의 얼굴은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 땐 추운 날 너무 많이 걸어서 힘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한옥마을로 오는 중간에 활명수를 먹겠다고 하더라. 그 때 물어보니 속이 좋지 않다고 했다. 작년 2월에 장 폐색증이라는 병을 앓은 이후 급속도로 살이 빠졌고 음식을 먹을 때도 여러 번 씹으며 천천히 먹고 있는데, 그게 재발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상황이었다. 평소의 민석이였으면 남이 사줄 땐 절대로 빼는 법 없이 최대한 비싼 것으로 주문하는 센스를 발휘했는데, 지금은 전혀 시킬 생각도 하지 않고 있으니, 이건 ‘레알 위급’인 상황이었다.
음료수가 나올 때까지 우린 각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카페에서 ‘영원한 사랑’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민석이가 테이블 밑을 바라보는 것 같더니, 토할 것처럼 소리를 내더라.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이라 민석이를 보며 “조금만 참아봐”라고 말한 후 부리나케 카운터로 달려가 비닐봉지 하나를 얻어와서 민석이에게 건네줬다. 민석이는 모두 토해내려는 듯 힘겨운 소리를 내며 게워냈지만, 위산과 활명수만 나왔을 뿐 음식물은 나오지 않더라. 그런데도 한결 속이 편해졌다며, 표정까지 밝아졌다. 큰 일 나는 줄만 알았는데, 그렇게 끝나서 다행이었고, 민석이는 토하느라 기운을 뺐는지 거기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잠을 잤다.
한 시간 정도를 카페에서 있다가 나왔다. 2016학년도의 트래킹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여러 추억을 남기며 끝이 났다. 어찌 보면 트래킹이란 교실이란 공간을 벗어나 다양한 환경, 예측치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배움이 발동하고 관계성이 발생하는지 느낄 수 있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의 트래킹은 꽤 만족스러웠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목차
지민이의 고군분투는 그 아이의 성장을 위한 과정이다
트래킹 회의 1 - 우리 지금 노는 건가요?
트래킹 회의 2 - 준비 또한 대충대충
트래킹 회의 3 - 성장의 바로미터, 지적을 받아들이는 정도
트래킹 회의 4 - 우여곡절 끝에 계획이 정해지다
여유로운 아침이 산산이 부서진 이유
시간에 쫓김은 불행이지만, 살아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조촐한 인원이 경복궁에 모이다
익숙하지만 그만큼 잘 모르는 곳, 경복궁
향원정에 와서 이름을 탐색하다
건청궁, 고종의 찬란한 꿈과 스러진 꿈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에만 느껴지는 간절함이란 감정.
통인시장 1 - 여기선 엽전으로 음식을 산다
통인시장 2 - 엽전체험으로 엽전의 의미를 알게 되다
그래 결심했어~
북촌한옥마을과 전주한옥마을을 비교하며
토할 때마다 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