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국토종단 15 - 4월 26일(일)
목사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나서 죄를 부끄러워한 나머지 하느님의 눈을 피해 숨어 있을 때, 오히려 하느님은 그런 아담을 찾아와서 위로해줬다는 성경 말씀을 인용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절망 가운데 있을 때조차 하느님은 언제나 함께 계시니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줬다. 그런데 그 구절로 저 메시지를 전하는 건 약간의 어거지가 섞여 있었기 때문에 좀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얘기는 저번 여행기에 담겨 있으니 그걸 보면 된다.
‘희망을 가지며 살라’는 메시지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보여준 영상이야말로 어찌 보면 나에게 던져주는 화두처럼 느껴졌다. 닉 부이치치의 강연 영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지금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강의를 하는 강사다. 그의 이야기는 단지 입으로만 뱉어내는 ‘말장난’이나 화려한 수사만은 아니었다. 직접 몸으로 보여주어 말과 행동의 일치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진실하며 간절한 행동보다 감동적인 것은 없다지 않은가.
그는 직접 몸을 쓰러뜨린다. 그는 손과 발이 없으니 앞으로 쓰러지면 일어설 수가 없다. 흡사 바퀴벌레가 뒤집어져 발버둥을 치듯이 그도 안간힘을 쓰며 일어서려 한다. 그는 “제가 이렇게 쓰러져 있는 상황이라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묻는다. 보통의 경우 ‘안간힘을 써서라도 일어나야죠.’라고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면 된다. 하지만 그런 당연함이 그에겐 매우 어렵고 힘든 일임을 알기에 선뜻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
침묵을 흐르는 중에 그는 “저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몸을 일으키려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해준다. 우리가 그렇게 대답했다면 그건 모든 조건이 갖춰진 자의 ‘거드름’이었을 지도 모르는데, 그가 말하니 ‘절절한 진실’, ‘결의에 찬 다짐’처럼 느껴지더라.
그는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정말 힘겨워보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굼벵이가 꿈틀대듯이 그도 자꾸 몸을 비비 꼬며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조금 일어나졌다 싶으면 다시 뒤집어져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니 말이다. 직접 나서서 벌떡 일으켜 주고 싶을 정도로 그 상황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런 ‘측은지심’은 무언가를 가진 자가 누릴 수 있는 ‘떵떵거림’이며 그를 의존적으로 만들어 홀로 서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장애인들이 일반인들에게 말하지 않던가? “우리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보거나 그런 마음으로 도와주려 하지 마세요. 그저 우릴 평범한 친구처럼 대해주면 됩니다.”라고. 같은 인격체로 대할 수 있으면 되는 거다. 그런데 우린 그들을 늘 ‘타자화’하며 늘 번거로운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았던가? 닉 부이치치를 보는 나의 시각도 딱 그것이었던 셈이다. 왠지 부끄럽더라.
몇 번을 그렇게 실패하다가 옆에 있는 전화기에 머리를 대고서야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희망이 있으면 아무리 일어설 수 없는 절망 가운데 있더라도 일어설 수 있음을 직접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니 눈물이 살짝 나더라.
닉 부이치치가 일어서려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중용』의 한 구절이 머리에 스쳤다. 노력을 강조할 때 흔히 인용되는 구절인데, 한 때 나에겐 신조가 되었던 구절이다.
남이 한 번에 그것을 할 수 있다면 나는 백 번씩 해서라도 그것을 하며, 남이 그 일을 열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천 번씩 해서라도 그 일을 한다. 참으로 이런 방식으로 해나갈 수 있다면, 비록 어리석더라도 현명해질 것이며 비록 연약하더라도 강해질 것이다. 『중용』 20장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 必明 雖柔 必强 『中庸』 二十章
이 구절에서 중요한 건 내가 남보다 못났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할 수 있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비교의식이 아니다. 그저 남과는 다른 나 자신의 ‘때’가 있음을 아는 것이고 그 시기가 올 때까지 노력하고 노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처럼 기회는 누구에게나 오지만,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포착하고 잡을 수 있으려면 그만큼 자신이 깨어 있고 닦여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려면 나만의 관점을 지닐 수 있어야 하고 그걸 꾸준히 지속해 나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나만의 리듬을 찾고 그 리듬을 구성하는 것이다. 닉이 번쩍 일어나기까지 안간힘을 썼던 그 절실함으로 말이다. 이 동영상을 통해 목사님은 ‘희망이 있으면 절망도 넘어설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을 테지만, 난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열심히 준비하는 자세로 살면 지금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읽혔다. 같은 동영상을 봐도 생각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 역시나 동영상도 메시지가 정해진 것이 아닌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수만 수천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외부의 주름’이다.
예배가 끝나고 자연스럽게 식당으로 내려가 밥을 먹었다. 옆에 중학생 남학생이 밥을 먹고 있어서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그 아이도 별로 거리껴하지 않고 친절하게 묻는 말에 대답해주더라. 이 기회는 나름 규모가 있는 교회인데 학생들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 학생 예배 시간이 아니니 그럴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 아인 교회에는 열심히 다니지는 않고 오랜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말해줬다.
밥을 다 먹고 그 아이가 물을 마시러 간다기에 장난처럼 “가는 김에 커피 한 잔 타다 줄래”라고 말했다. 보통 이렇게 말하면 불퉁거리며 “그건 아저씨가 타다 드세요”라고 말할 것이기에, 그런 퉁명스런 대답을 기다렸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알겠어요”라고 하더라. 그러더니 정말 커피를 타다 줬다. 물도 적당히 맞춰줘서 맛있게 마실 수 있었다. 어린 친구에게 생각지도 못한 커피 대접까지 받고 보니, 여기가 낙원이란 생각이 들더라.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한 후에 배낭을 메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있어 꽤나 더워졌다. 교회를 돌아 아까 들어왔던 길로 나가려는데 골목길에서 누군가 나오는 것이다. 누굴까 하고 봤더니, 글쎄 아까 그 아이이지 않은가? 난 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삥 돌아 나온 것이고, 그 녀석은 지름길로 질러서 온 거이다. 마을 어귀까지 함께 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참 정겹고 재밌는 시간이다.
확실히 저번 주와는 많은 부분이 다르다. 저번 주는 도보여행 자체가 처음이라 그저 걷기에 바빴고 적응하기에 바빠, 특별한 에피소드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 주는 벌써부터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만큼 풍성하고 뜻 깊은 여행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많이 민폐를 끼치고, 많이 치대며 여행을 하다 보면 더 많은 인연들과 엮이게 될 것이다. 과연 오후엔 어떤 이야기들이 생겨날까.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