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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Mar 08. 2017

송파마을예술창작소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영화 교사 이야기 3

2017년 2월에 학교 이전이 계획되어 있었다. 14년 8월에 강동구 둔촌동에서 송파구 송파동으로 이전했으니, 2년 반만에 다시 이전을 하게 되는 셈이다(학교를 이전한 이야기는 이 다음 글에 쓸 예정임).

저번에 이전할 땐 학교 수리에 관련된 모든 일(방문을 유리문으로 다는 것, 이층 난간에 펜스를 설피하는 것, 대문을 새롭게 설치하는 것)은 승빈맘이, 이사와 관련된 모든 일은 근호맘이 도맡아서 해줘서 편하게 이전할 수 있었다. 역시 학부모님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학교다 보니, 이런 식으로 백지장을 맞들 듯 함께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게 정말 좋다. 그런데 영화 교사 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학교 이전 이야기를 하는 게 왠지 생뚱맞아 보일 것이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이 이야기에 영화 교사 이야기의 세 번째 이야기가 숨어 있으니, 천천히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 단재학교 송파동에서 석촌동으로 2월 20일에 이전했다. 학교의 이전과 영화는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컴프레서 가지러 왔수다

     

이번에도 근호맘은 이사에 관련된 일을 도맡아 해준다고 했다. 근호는 2년 전에 졸업해서 다니고 있지 않지만, 예전의 고마운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준 것이다. 그런데 저번과는 달리 학교 수리를 해줄 부모님은 없었다. 그러니 모든 수리는 우리가 도맡아서 해야 했다. 성내동으로 학교를 이전할 때 나무문을 떼어내고 유리문으로 모두 바꿨었는데, 그걸 모두 떼어내고 새롭게 이전할 석촌동 학교에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아무래도 학교는 집과는 달리 안과 밖이 완전히 차단되는 나무문보다는 확인할 수 있는 유리문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 완전한 유리문이 아닌, 반쯤 유리가 대어진 문. 학교라는 시설에 더 알맞기에, 이걸 이전하는 곳으로 떼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문을 다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그냥 경첩에서 나사를 풀고 그걸 다른 문으로 교체한 후 조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마다 경첩의 위치도 다르고 손잡이 걸쇠가 걸리는 위치도 다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문틀을 끌로 깎아 맞춰야 했던 것이다. 어찌 어찌 승태쌤이 목공을 제법 잘 하기에 문을 재설치하는 일은 끝이 났다. 그런데 경첩의 위치와 걸쇠의 위치가 바뀐 곳마다 덧대어 놓은 나무를 고정할 컴프레서와 타카기가 없었기에, 작년에 ‘걸어서 송파로’ 사업으로 인연을 맺은 송파마을예술창작소(이하 마술소)에서 빌려와야 했다. 

컴프레서의 무게는 실로 어마 무시하다. 자동차로 나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승태쌤 차를 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술소에 있는 수레를 이용하여 직접 옮겨야만 했다. 마술소부터 단재학교까진 15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고, 두 번의 횡단보도를 건너야만 한다. 학교의 모든 일정이 끝난 어슴푸레한 시간에 컴프레서 수송 작전이 펼쳐졌다. 승태쌤과 처음으로 찾아간 마술소는 지하에 있음에도 깨끗하고 영화 관람 시설부터 목공시설까지 모두 갖춰진 최상의 공간이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김정아 대표님이 계시더라. 승태쌤과는 이미 구면이기에 자연스럽게 최근에 추진하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송파마을예술창작소는 요모조모 살펴볼 곳이 많다. 예술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게 완비되어 있고 공간도 넓다.




컴프레서에서 영화로

     

정아쌤은 “이번엔 영화와 목공으로 수업을 진행하려 하는데, 목공은 이미 정해졌고 영화 쪽 사람 중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주세요”라는 말을 했고, 승태쌤은 나를 지목하며 “건빵쌤이 단재학교에서 5년 간 영화팀 교사로 근무하고 있어서, 그쪽에 대해선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라고 대답을 했다. 전혀 생각도 못한 곳에서, 그것도 컴프레서를 빌리러 간 자리에서 영화와 마주치게 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래서 뭐든 해볼 필요가 있고, 어떤 사람이든 만날 필요가 있다는 말이 나오는 거다. 만날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며, 도전할 때 지금껏 상상도 하지 못한 일들이 생긴다. 생각은 언제나 현실에서 엇나가며, 현실은 언제나 생각으론 도무지 알지 못했던 것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제안은 솔깃했지만, 그럼에도 매주 토요일마다 2시간씩 하며, 그것도 30주에 걸쳐서 해야 한다는 점이 망설여지게 했다. 한 번 하기로 했으면 매주 토요일에 다른 일정은 잡지 말아야 한다는 거였고, 이런 식으로 단재학교 아이들과 영화를 제작하는 것 외에 다른 아이들과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였다. 처음 시작할 때 느껴지는 불안과 떨림이 나를 휩쓸어서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까지 느끼게 할 정도였다. 최근에 많이 나아진 줄만 알았는데, 여전히 새롭게 시작할 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불안하기만 하다. 그래서 그 순간에 바로 결정하지 못하고 명함만 받아왔다.               



▲ 2012년에 처음으로 영화팀 교사가 되어 전주영화제를 찾아갔다. 그게 벌써 5년이나 흘렀다.




오랜만에 설렘에 몸서리치던 밤을 맞이하다

     

그 날 밤에 여러 생각을 하며 결정을 해야 했다. 우선 토요일마다 시간을 빼야 하는 문제는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면 되기에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보다 큰 문제는 ‘새로운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과정을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부분이었다. 이런 고민은 최근엔 해본 적이 없다. 어느새 단재학교에서 5년이 넘도록 생활하면서 아이들과는 매우 친해져서, 불편하고 어색하여 힘들다는 느낌을 거의 느낄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에 그 친함에 사르르 녹아들어, 어색함이 주는 두려움, 낯섦이 주는 심란함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국토종단을 떠나기까지는 어색하다는 게, 낯설다는 게 그렇게 싫었었다. 그러니 늘 친한 사람들과 익숙한 곳에서 계획적으로 행동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다 연거푸 임용에서 떨어지고 더 이상 삶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자, 그때부턴 오히려 어색함, 낯섦을 긍정하게 됐다. 모르기 때문에 알고 싶고 낯설기 때문에 친해지고 싶은 그 마음이야말로 모든 관계나 상황을 시작하게 하는 힘이라는 걸 느꼈다. 그런 힘은 두 번의 도보여행(국토종단사람여행)을 떠나게 했고, 단재학교에 근무하면서 여러 여행(남한강 도보여행, 지리산 종주,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을 떠나게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낯섦은 어느 순간에 친숙한 것이 되고, 어색함은 어느 순간에 편한 것이 된다. 그러다 보면 예전의 나처럼 스스로 낯섦을 기피하고, 어색함을 달가워하지 않게 되어 지금은 그저 현실에 안주하고, 편안함에 머물려고만 한다. 이 날 저녁에 이미 편안함에 쪄들다 못해, 다양한 경험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내 모습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도보여행을 하던 그때의 마음을 돌아봐야만 했다. 어색함을 즐겼고, 낯섦을 사랑했던 그 때의 뜨거움을 말이다. 아니 오히려 이 기회를 통해 그때의 그 뜨거움을 다시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불연 듯 ‘이건 꼭 해야만 해’라는 생각이 들었고, 하기로 맘먹었다.                



▲ 결국 바로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해야 했다. 그만큼 편안한 생활에 젖어든 것이다.



하려고 맘을 먹으니일이 풀려간다

     

영화 기획의 기본 컨셉은 20명 정도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30주 동안(15차시 2회로 진행하거나, 10차시 3회로 진행하거나)에 영화 만들기다. 처음으로 공모사업 양식을 작성해야 하니, 막막하더라. 그래서 2월 18일 토요일 내내 끙끙대며 쓸 수밖에 없었고, 다양한 공모사업을 해본 승태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위대한 첫 발걸음이 그렇게 시작된 거다. 

처음엔 7~10명 정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할 생각이었기에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정아쌤은 “20명 정도의 학생을 대상으로 해야 하며, 강사진도 주강사 한 명과 보조강사 한 명을 더 보충해야 해요”라고 알려주더라. 주강사 경우엔 예술 활동을 해온 이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했지만, 보조강사는 사진을 찍고 보조해주는 역할을 하면 됐기에 별다른 이력이 없는 사람이어도 괜찮다고 했다. 



▲ 진규의 초기작. 제목이 '천사와 악마'였던가.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매우 맘에 드는 그림이고 [킹스맨]의 발렌타인이 생각난다.



그때 단연 처음으로 생각난 사람은 진규다. 고등학교 때 친구이기 이전에 예술적으로든 철학적으로든 많은 영향을 준 친구이니 말이다. 시각디자인과를 나와 지금도 예술분야의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이력 사항에선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고, 이번 기회를 통해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4년 전에 단재학교 아이들과 진규가 함께 하는 미술수업을 개설하려 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좌초됐었는데, 이런 계기로 함께 만들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래서 바로 전화를 해서 의견을 물어봤고, 다행히도 하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다. 

보조강사는 어찌 보면 편하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학과 후배인 민희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한 번도 수업을 같이 들어본 적은 없지만 어찌 인연이 되어 스터디도 할 수 있었고, 서울에 와서도 여러 번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보조강사를 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 매주 토요일마다 30주에 걸쳐 한다는 게 부담이라고 하더라. 같이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다고 하니 무척 아쉬웠다. 

그 다음엔 송파구에 살고 있어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종연이가 떠올랐다. 그래서 전화를 해보니, 올해부턴 고등학교 사서교사로 일하게 되어 토요일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면서, 될 수 있으면 하고 싶다고 알려줬다. 막상 아이들과 만나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함께 보며 경험할 수 있다는 게 좋은 기회라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어찌 되었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공모 신청서도 잘 마무리되었고, 강사진도 짜임새 있게 갖춰졌다. 과연 이 공모사업에 당선되어 우리가 함께 새로운 도전을 해나갈 수 있을까? 영화를 매개로 20명의 아이들과 모여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을까? 너무나 익숙한 삶의 문법과 방향에 젖어들어 흐물흐물 살아가던 나에게 모처럼만에 훈풍이 불고 설렘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떨까?



▲ 도보여행을 하던 때의 낯섦에 대한 기대, 어색함에 대한 설렘을 오랜만에 느껴볼 수 있었다.




목차     


1. 한문전공자가 영화 교사가 되다

영화의 영자도 모르는 사람이 영화팀을 맡다

직업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닌, 정해지는 것     


2. ‘영화의 영자도 모르는 영화교사의 좌충우돌기

몰라서 만든 영화 『다름에의 강요』

영화팀의 처음으로 언론인이 되어보다

광진IWILL과 영화팀, 영화로 만나다

2017년 영화교사로 한 단계 비약하다


3. 송파마을예술창작소에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다

컴프레서 가지러 왔수다

컴프레서에서 영화로

오랜만에 설렘에 몸서리치던 밤을 맞이하다

하려고 맘을 먹으니, 일이 풀려간다

    

4. 2017년에 쓰게 될 영화교사 이야기는?

기회가 불연 듯 찾아오면

하나의 계기는 다른 계기를 만들고

그런 계기들이 모여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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