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민들레 [곤란한 결혼] 읽기 모임 4
최근에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불쌈꾼 백기완’이란 다큐를 봤다. 백기완, 그는 한국전쟁에서 학도병으로 참전을 했었고 늘 반정부세력으로 낙인찍혀 모진 고문과 오해를 당해왔다.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라 할 만하다.
이 영상에서 버럭 눈물이 났던 부분은 마지막 「묏비나리」라는 시를 읊조리던 장면에서였다. 이 시는 훗날 광주 민주화항쟁의 주제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만들어져 불리기도 했다.
맨 첫발 딱 한발 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 없는 춤꾼이라도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 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아니 그 한발 띠기에 언 땅을 들어 올리고 또 한발 띠기로 맨 바닥을 들어 올리다가 저 살인마의 틀거리를 몽땅 들었다 엎어라.
꽹쇠는 갈아쳐 판을 열고 장고는 몰아쳐 떼를 부르고 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 북은 쌔려쳐 저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 왕창 쓸어안고 무너져라.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우리 흔들리지 말자.(하략)
-「묏비나리」, 백기완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바로 ‘한발 띠기’다. 한발 어떻게 떼느냐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한발 띠기에 따라 나의 행동이 달라지고, 내 삶의 이정표가 극명히 갈린다. 그러니 한발 띠기를 결코 소홀히 해선 안 된다. 한발 띨 때마다 그 한발의 무게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자신을 바꿀 것이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변화시켜 나갈 것이다.
한발 띠기를 민들레 모임에 가져다 붙이는 게 억지스러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함께 모여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각자에겐 한발 띠기와 같은 의미일 수 있다. 함께 어우러져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자신의 삶을 좀 더 내실 있게 가꾸기 위한, 사람과의 관계를 주체적으로 만들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한발 띠기가 결코 우아하지 않아도, 거창하지 않아도, 엄청난 변화를 동반하지 않아도 그렇게 뚜벅뚜벅 가는 것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곤란한 결혼』을 이야기하려 모인 이날도 우리에겐 한발 내딛던 날이었다.
『곤란한 결혼』이란 책이 드디어 이야기의 중심 주제로 올라왔다. 그러자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책 제목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누군가는 “책 제목이 임팩트가 있어서 좋아요”, “신선해요”라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지하철에서 봐야 할 땐 제목을 가리고 볼 정도였어요”라고 말했다. 두 얘기는 상반된 반응이지만, 그런 반응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책 제목이 화끈하다’는 거다.
이런 반응에 대해선 저자인 우치다쌤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들어가는 글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다.
주위의 남성 기혼자들은 모두가 ‘곤란한 결혼’이라는 제목의 책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본인들이 오죽 공감했으면 그러겠어요.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하지만 그런 제목의 책을 거실 책꽂이에 꽂아두기엔 좀 곤란하겠어요. 와이프가 ‘이 책 뭐야? 나랑 같이 사는 게 그렇게 힘들어?!’라고 따지고 들면 어떻게 해요?”하며 겁에 질린 얼굴로 말하더군요.
-『곤란한 결혼』, 우치다 타츠루 저, 박솔바로 역, 민들레 출판사, 2017년, 11쪽
배우자가 봐선 서로가 곤란해지는 책 제목이라니. 그래서 누군가는 “남편이 볼까봐 책장에 꽂아 놓긴 좀 그렇던데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솔직히 이런 식의 반응을 들을 때 ‘겨우 책 제목 때문에 그렇게까지 난처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 과민반응처럼 보였다. 그건 마치 『롤리타』를 읽는다고 해서 ‘나를 아동 성애자로 보면 어쩌지?’라거나, 『사랑하지 말자』를 읽는다고 해서 ‘나를 애정 혐오자로 보면 어쩌지?’라고 걱정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즉, 읽는 책과 나의 성향은 하등 상관이 없다고 믿었으며, 다른 사람도 책 제목으로 나를 오해하진 않을 거라 믿었던 거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는데 머지않아 『책 제목이 독자의 삶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고찰』이란 논문 제목이 나올 것만 같은 상황을 경험하고야 말았다. 학교에서 다시 책을 읽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곁에 와서는 “선생님 무슨 책 읽고 있어요?”라고 궁금해 하며 책 표지를 들춰보더라. 이런 경우 보통 다른 책들은 표지가 화려하여 제목이 눈에 잘 띄지 않기에 한참동안 들여다보곤 했는데, 이 책은 표지가 심플하여 집중하지 않아도 책 제목이 한 글자 한 글자 눈 속에 알알이 박히는지라 표지를 들춘 지 채 0.1초도 지나지 않아 외마디 감탄을 지른다. 그러면서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그건 마치 부처와 가섭 사이에 있었던 염화미소拈華微笑 같은 거라고나 할까. 그렇게 몇 명이 미소를 짓고 갔지만, 나와 5년 동안 함께 생활해온 여학생은 그걸로 부족했던지 기어코 “혼자 사니 많이 힘들죠?”라고 한 마디 뱉는다. 아이쿠야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건빵쌤 그러다 결혼이나 하겠어요?”라고 농을 치던 아이였는데, 책 제목까지 그런 농담을 한껏 거들어주고 있었던 셈이다. 결혼을 안 하고 있던 내가 『곤란한 결혼』이란 책을 읽고 있으니, ‘결혼하는 걸 곤란해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는 건 매우 당연한 거겠지. 이쯤 되면 ‘곤란한 결혼’이 아니라 ‘곤란한 제목’이라 해야 할 정도다. 막상 이런 상황을 겪고 보니, 왜 그렇게 책 제목에 대해 말들이 많았는지 이해가 저절로 된다. 나야 학생들이 장난치듯 그런 것이니 상관없지만, 실제 기혼자들은 아마 진땀 꽤나 빼야할 것이다.
그렇긴 해도 나는 이 제목이 참 맘에 들었다. 우선 나처럼 30대가 넘었음에도 결혼하지 않은(못하는) 미혼자들에겐 ‘결혼하는 건 쉽지 않은 곤란한 일이다’라는 인상이 있기에 이만큼 적절한 제목도 없으며, 막상 결혼을 한 기혼자에게도 ‘결혼생활=곤란한 일의 연속’이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제목이니 말이다.
제목도 충분히 파격적이어서 여러 얘기들이 돌고 돌았지만, 제목 못지않게 내용은 더 한 수 위인지라 장내의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니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라 해야 맞다.
이런 뜨거움을 무지 무지 사랑한다. 그건 그만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는 뜻이고, 그걸 검열하거나 ‘나만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면 어떡해?’라고 걱정하지 않고 느낀 그대로 말할 수 있는 분위기라는 뜻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민들레 읽기 모임에 참여하면서 이런 식으로 치열하게 이야기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2년 전에 읽기 모임에 참여했을 땐 그 즈음에 발행된 격월간지 『민들레』를 읽고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 책엔 여러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러니 논쟁적인 이야기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감명 깊게 읽은 부분을 소개하고, 그에 따른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니 서로의 대화에 집중하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에 반해 이번엔 하나의 주제를 담은 단행본이 선택됐다. 더욱이 『곤란한 결혼』이란 책은 그간 우치다쌤이 이상적인 이야기를 한 다른 책에 반해 꽤나 현실적인 조언들을 담고 있다. 그러니 읽는 내내 ‘이건 우치다쌤처럼 성공한 인텔리만이 할 수 있는 얘기잖아’, ‘이건 일본이니까 가능한 얘기잖아’, ‘이건 남자이기에 할 수 있는 얘기잖아’라는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좀 더 극단적인 표현을 빌려 “이 책은 결혼에 대한 자기개발서처럼 보여요”라는 말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게 읽힐 만한 내용도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얘기하게 됐다. 그래서 “통념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한다”, “우치다쌤은 『하류지향』과 같은 책을 통해 겉으로 드러난 일화 속에 탁월한 메타 메시지를 숨겨서 보여주곤 했다. 이 책도 그런 메타 메시지가 가득하기에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이 책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다른 사람과 살아가는 ‘공생의 기술’을 담고 있으니, 현실적인 조언이 부적절하다고 해서 무작정 깎아내려선 안 된다” 등의 말도 나온 것이다. 그래서 책도 갈비처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해봐야 그게 겉만 번지르르한 책인지, 정말 맛있는 책인지를 알 수 있다.
최근 『남한산성』이란 영화가 개봉했다. 두 명의 다른 신념을 가진 신하가 자신의 신념을 걸고 한 바탕 설전을 벌이는데, 말과 말로 하는 싸움이 무기를 들고 하는 싸움 이상의 박진감과 긴박감을 선사한다. 우리야 나라의 명운을 걸 만큼 중요한 자리에 있지도 않고 신념이 확연하게 달라 목숨을 걸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대화의 치열함은 최명길과 김상헌을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고 자부한다. 다음 후기에선 책 한 권을 두고 얼마나 치열하게, 얼마나 맛있게 이야기를 나눴는지 그 순간을 풀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