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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Nov 18. 2017

여기에 사람이 있다

2017 민들레 [곤란한 결혼] 읽기 모임 8

어린아이는 티 없이 맑고 밝다. 별 것 아닌 것에도 까르르 웃고 자그마한 일에도 눈물을 터뜨린다. 그래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인간을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 세 유형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며 어린아이를 칭송한 것이다.                



▲ 낙타는 묵묵히 순응하는 존재, 사자는 맞서는 존재, 하지만 어린아이는 인생을 즐기는 존재다.




돈이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다

     

그런데 점차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지닌 삶에 대해 무한히 긍정하는 마음을 망각하게 하고, 세상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을 고정관념으로 덮어가게 한다. 더 이상 웃을 일도, 더 이상 울 일도 없이 표정은 사라지고, 감정은 가문 땅처럼 굳어지다 못해 쫙쫙 갈라진다. 살아 있기에 따뜻한 피는 흐르지만, 감정은 메말라 다른 존재에 대해 관심도 갖지 않고 그들의 고통에도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마비된 어른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모든 게 지옥일 수밖에 없다. 보편 교육을 위해 특수학교를 세워야 함에도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마을 이미지가 훼손된다”라며 소리를 지르고, 터널 붕괴 사고로 한 사람이 갇혀 막대한 구조비가 들고 그로 인해 인근 터널 공사까지 무기한 연기되자 “솔직히 눈치 보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저번에 도롱뇽 하나 때문에 터널 공사가 중단됐던 것 기억하시죠. 그때 국가 경제가 얼마나 손해를 본 줄 아십니까? 요~ 요~ 도롱뇽 몇 마리 때문에(영화 『터널』 중)”라며 돈의 가치로 사람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재단해 버린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인정보단 이성을, 공감보단 적대감을, 협력보단 경쟁을, 정의보단 효율을 중시한다. 그러니 집값이 떨어진다며 당연히 필요한 교육시설 설립을 극구 반대하고, 효율을 따져 사람 목숨을 구할지 말지를 결정하려 한다.                



▲ 우리의 안에 도사리고 있는 차별과 그에 따른 폭력성은 우리 주위의 뭇 사람들을 '사람이 아닌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럼에도 곳곳엔 아직도 사람향기가 난다 1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이 돈이 모든 걸 좌우하는 시대에 제비꽃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참으로 신선했다. 복원은 품이 많이 들고 과학적 검증까지 해야 하기에 비용도 만만치가 않다고 한다. 그러니 복원비용 이상의 값어치를 지닌 물건, 단종된 추억이 깃든 물건,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물건이 아니면 복원은 감히 꿈꿀 수도 없다. 

그런데 최근에 의뢰가 들어온 벽지의 경우엔 위의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특이한 경우였다고 한다. 이 벽지로 말할 것 같으면 스튜디오의 한 공간에 발라져 있던 것으로, 어느 단체가 그 스튜디오를 빌려 사용한 후에 망가졌다고 한다. 예전처럼 양말을 기워 입고 옷을 덧대어 입는 시대가 아닌, 사용한 후에 망가지면 새 물건을 사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대엔 ‘고치지 않고 새 것을 사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기치다. 그건 비용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세태의 반영이기도 하다. 



▲ 벽지가 훼손된 게 보인다. 이 상황을 본 순간 주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런 시대에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 집이 자기 소유도 아니고 단순히 임대한 것임에도, 다시는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놓은 벽지가 아닌 공산품 벽지임에도 복원해달라고 의뢰를 해왔으니 말이다. 솔직히 제비꽃님도 초반엔 견적서를 받으면 그만 둘 거라 생각했단다. 그런데 그 분은 그런 예상을 보란 듯이 깨고 계약을 했다. 이 상황이야말로 돈의 가치에 묻히지 않는 벽지의 가치를 알아본 경우라 할 수 있으며, 등가교환의 가치보다 ‘Only 1!’의 가치에 충실한 경우라 할 수 있다.                



▲ 우린 교육을 통해서도 등가교환이 가능한 인재로 키우려 한다. 하지만 누구나 'only 1'일 뿐이다. 위 영화는 그 해답을 담은 영화다.




그럼에도 곳곳엔 아직도 사람향기가 난다 2

     

이 얘기로 끝났어도 사람 향기 풀풀 날리는 훈훈한 이야기로 충분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단어처럼 ‘멋짐 폭발’이나 ‘오지구요, 지리구요’한 내용이 더 있으니 말이다. 

주인이 벽지를 복원해달라고 의뢰한 경우, 훼손시킨 당사자는 오히려 ‘그깟 벽지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왜 이리 호들갑이야?’라고 생각할 법도 하다. 좋은 벽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새 벽지를 바르는 게 오히려 더 싸게 먹히는 시대에 웬 돈지랄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복원을 맡은 이에게 편지를 띄워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복원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전달했다. 



▲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사진. 그렇게 공산품은 다시 예술작품으로 태어나고 있다.



훼손된 벽지에 대해 “의뢰받으신 벽지는 스튜디오의 시그니처와 같은 중요한 부분이며, 주인 분께서 정말 소중히 여기는 공간”이라고 밝히며, “그러한 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좋아하고 아끼는 공간에 상처를 입힌 것이 부끄럽고, 작품에 대한 존중을 갖지 못했다는 게 예술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대단히 잘못되었다”라고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주인의 벽지에 대한 마음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면서 “저는 그 공간이 꼭 이전처럼 복원되기를 바랍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날의 저를 꾸짖어 피해를 막고 싶지만... 어떤 것도 지나간 일은 잡을 수 없기에, 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기에,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교수님,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소중한 공간에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 수 있게 힘이 되어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벽지의 주인 못지않은 절절한 진심을 한 자 한 자에 담아 전달했다. 

요즘처럼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고, 헌 것보단 새것을 좋아하는 시대에 참으로 보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벽지를 사랑한 주인이나, 그런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 복원 전문가에게 편지를 띄운 훼손자나 돈의 가치로 재단되지 않는 예술의 가치, 효율로는 따질 수 없는 본질의 가치를 알았던 것이다. 각박해져 가고, 살벌해져가는 삶 속에 이와 같은 미담은 ‘그럼에도 삶은 살아갈 만하다’는 희망을 갖게 하고 여전히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소망을 갖게 한다. 4%의 소금 덕분에 바닷물이 썩지 않듯, 10명의 의인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지 않듯, 우리나라에도 이런 정감을 지닌 이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에 그래도 아직은 ‘살 만한 곳’이겠지.                



▲ 세상에 둘도 없는 오직 하나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벽지.




사람향기에 취해 돌아오다

     

위에서 인용한 영화 『터널』의 대사는 건설사 관계자의 발언이다. 그 발언을 듣고 있던 구조 책임자는 울분을 토하듯 다음의 대사를 뱉는다.      


저기요이정수씨는 도롱뇽이 아니라 사람인데요지금 저기 터널에 계신 분은 파충류가 아니라 사람입니다사람그런데 자꾸 까먹는 것 같아서지금 저기 사람이 갇혀 있습니다사람이~” 

    

그렇다 우린 지금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힘을 모아 살아가고 있다. 결코 나 혼자만은 살 수가 없고 살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자꾸 함께 살아가는 뭇 사람들을 까먹는다.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혼자만 살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다른 사람을 경계하고 불순물처럼 여기며 혹 나에게 피해나 끼치지 않을까,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지나 않을까 불안해한다. 



▲ 우리는 자꾸 잊어버린다. 나만 생각하느라 내 주위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들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걸.



몇 년 전 영화팀 아이들과 함께 달성군에서 서울까지 자전거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달성군에서 올라오는 자전거 길에서 라이딩을 하는 사람을 마주치기만 하면 동지애가 느껴져 반갑게 인사도 건네고 “힘내세요”라며 힘을 북돋워주기도 했다. 그런데 여주에 들어서니 그런 훈훈한 광경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었고 오히려 사람이 곁을 지나칠 때면 “좀 비껴”라고 역정을 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 차이는 사람이 적은 곳에선 사람이란 존재가 축복으로 여겨지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선 사람이란 존재가 짐짝으로 폄하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린 사람이 가득 찬 도시문명에 깊이 빠져든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기에 사람이 있다’는 걸 까먹었는지도 모른다. 



▲ 서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사람이 늘어간다. 그러니 사람이 더 이상 선물처럼 보이지 않게 된다.



그렇게 각박해져 갈 때, 사람이 모두 해충처럼 느껴질 때, 사람마저도 돈 덩어리로 보일 때 우린 그 현실이란 무대에서 잠시 내려와야 한다. 그 상황 속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런 생각은 고정관념으로 깊이 뿌리박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일상에서 벗어나 이상함을 좇아야 하고, 늘 만나던 사람들을 떠나 별로 만나지 않던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전혀 다른 시각이 있다는 걸, 선물과 같은 관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니 말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나는 민들레 읽기 모임을 찾아오는 것 같다. 민들레 모임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민들레 홀씨가 날아와 마비되어 있던 어린아이적 감수성을 살려내고 돈이란 가치 이외에도 수많은 가치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한다. 그렇게 마비가 풀리면 그제야 비로소 세상이 달라 보이고 삶이 고귀해 보이며 뭇 사람과의 관계가 축복으로 여겨진다. 

『곤란한 결혼』이란 책으로 시작된 우리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민들레 가족들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벽지에 담긴 사람향기’에 대한 이야기까지 종횡무진 뻗어나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렸고 배가 출출한 시간이 되었다. 어화둥님이 준비해둔 떡볶이를 맛있게 먹고 어화둥님 집에서 나왔다. 아무래도 예년과는 달리 평일이 아닌 일요일에 모였던 터라 1박을 하는 건 무리였기에 다들 저녁을 먹자마자 자연스럽게 파장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민들레 같던 사람들과의 반나절 동안의 만남이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로 흘러가고 있었다. 



▲ 포커스가 나갔지만, 우리의 푸짐한 저녁 만찬이었다. 어화둥님의 노고가 가득한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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