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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15. 2019

집에서 별로 나가지 않는 인문학자가 들려주는 교육이야기

공생의 필살기 1

20일엔 고베에서 비행기를 타고 인천으로, 인천에서 차를 타고 전주로 이동하여 강연을 했고, 21일엔 전주에서 차를 타고 광주로, 광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이동하여 강연을 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이란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걸 거다. 나라와 나라를 이동하고,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여 이야기를 한다.               



▲ 인문학자이자, 무도인인 우치다 타츠루가 제주도에 왔다. 그의 강연 내용이 이제 시작된다.




사람을 모이게 하고 시공간을 초월하게 하는 이야기의 힘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만, 우치다쌤의 언어는 박동섭 교수의 통역을 거쳐 강연장에 모인 이들에겐 마치 한국어로 강연을 듣는 것처럼 편안하게 다가온다. 강연 내용은 일상에서의 경험담, 그리고 어떤 본질적인 것에 대한 탐구, 그러면서도 잊고 살아온 이야기까지 종횡무진 누비다보니 어려운 듯, 쉬운 듯, 알겠는 듯, 모르겠는 듯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그 자리에서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지만, 분명한 건 이야기 자체가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단순히 음의 진동이 아닌 뇌를 자극시키고 상상의 나래로 초대하여 시공간을 넘나들게 만든다. 그래서 예전엔 이야기꾼傳奇叟이 마을을 방문하면 남녀노소할 것 없이 주위에 둘러 앉아 한 구절이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고 지금 우치다쌤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날엔 우치다쌤이 흥에 겨워 강연을 했고 청중들도 강연에 빠져들어 웃긴 내용이 나올 땐 함께 웃고 전혀 생각도 못한 얘기가 나올 땐 눈이 휘둥그레지며 열띤 분위기를 만들었다. 물론 나는 현장에 가서 직접 강연을 들은 것이 아니니, 녹취파일을 들으며 문서작업을 할 때 느껴지는 분위기가 그랬다는 것이다.               



▲ 우치다쌤의 이야기와 박동섭 교수의 통역. 둘은 둘인 듯 하나인 듯 섞여 묘한 시너지를 냈다.




우치다 쌤의 별명과 그 이유

     

여기저기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강연장엔 활기가 가득하다. 이런 분위기에 맞게 박동섭 교수가 우치다쌤의 별명을 얘기해준다. 아마도 강연장 내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때문에 동섭쌤은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짐짓 그와 같은 얘기를 꺼낸 걸 테다.  

‘知의 전도사’라는 별명을 먼저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건방지게 스스로 앎에 대해 자임한다’고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별명이란 대부분 남이 지어준 것이다 보니, 과장되게 마련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치다쌤도 그 별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좀 더 유머러스하게 ‘집에서 별로 나가지 않는 지의 전도사’ 또는 ‘지적 괴물’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게 좋다고 하셨다. 

이 중에서 특히 ‘집에서 별로 나가지 않는 지의 전도사’란 별명은 우치다쌤을 잘 설명해주는 별명이다. 왜 그런지는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면 의외로 ‘집에서 별로 안 나간다’란 말이 ‘방안퉁수’ 또는 ‘골방철학자’라는 부정적인 의미 외에 전혀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엠마누엘 칸트, 우치다 타츠루,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이 세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은 곧 알게 된다. 




인문학자가 교육을 말한다는 것의 의미 

    

그러면서 특히 “우치다 선생님은 교육학자가 아닌 인문학자입니다. 그렇기에 인문학자가 본 교육에 대한 얘기임을 유념하여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강조했다. 교육학자가 말하는 교육, 의학자가 말하는 의학, 심리학자가 말하는 심리는 분명 어떤 전문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린 그 전문성을 신뢰하며 그 말들을 ‘진리’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라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한 분야만을 맹신하고, 한 이론만을 신봉하여 오히려 시야가 좁아지거나, 자신이 쌓아올린 틀에 갇혀 편견에 휩싸일 수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은 공간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고,

여름철 벌레에게 얼음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은 시간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며,

견식이 좁은 사람에게 道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은 가르침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는 벼랑 끝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아 비로소 그대의 추함을 알게 되었으니, 장차 그대와 더불어 큰 이치를 말할 수 있겠구나.  -『장자』「추수」

北海若曰: “井䵷不可以語於海者, 拘於虛也; 

夏蟲不可以語於氷者, 篤於時也; 

曲士不可以語於道者, 束於敎也. 

今爾出於崖涘, 觀於大海. 乃知爾醜, 爾將可與語大理矣.  - 『莊子』 「秋水」 17    


      

우리가 알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井底之蛙’의 원문 내용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를 싸잡아 비판할 수는 없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기 분야의 한정된 틀에 갇혀 ‘누구나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전혀 다른 관점’을 금기시하여 옭아 맬 수도 있다. 

‘우물 안 개구리’는 공간에 갇힌 사람(우리 것이 제일이여!), 시간에 얽매인 사람(조선시대는 한심한 시대였어!), 하나의 가르침을 진리로 여기는 사람(‘사문난적’과 ‘이단’은 모두 쳐내야 해!)을 모두 포괄하여 말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전문가라 생각하고 있다면, 당연히 이 세 가지에 매여 있지 않나 수시로 돌아봐야 한다. 그럴 때 협소한 공간, 한정의 시간,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 너른 대양을 향해 나갈 수 있으며 다양한 관점을 폭넓게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박동섭 교수가 ‘인문학자가 본 교육’이라 강조했던 이유는 위와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제주 강연은 ‘집에서 별로 나가지 않는 인문학자가 전하는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교육이야기’라 부제를 달아도 될 것이다.     



▲ 제주에 오기 전엔 전주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에 대해 강연했다. 역시 강연의 맛은 뒷풀이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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