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4일(월)
탈디쿠르간에서의 정식적인 첫 날이다. 어젠 공휴일이고 야외 활동을 한 것이니, 워밍업을 한 셈이다. 워밍업치고 좀 빡센 워밍업이었지만, 그 때문에 대통령학교 학생들과 친해졌고 단재친구들의 색다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오히려 빡센 일정이었기에, 그런 속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나는 야외활동을 좋아한다. 아무리 책상에 앉아서 세상을 파헤친 글을 읽고, 이상을 그리며 삶을 비판할지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말과 행동이 따로 놀 수밖에 없다.
아아, 골방에 갇혀 천하를 꿈꾼들 무슨 소용 있으랴.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욕망은 우리 마음속에 고이고 썩고 응어리지고 말라비틀어져, 마침내는 오만과 착각과 몽상과 허영과 냉소와 슬픔과 절망과 우울과 우월감과 열등감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때로는 죽음마저 불러오기도 한다. 골방 속에 갇힌 삶... 아무리 활달하게 꿈꾸어도, 골방은 우리의 삶을 푹푹 썩게 하는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구? 상상은 자유지만, 자유는 상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기철, 『아홉 살 인생』, 청년사, 2001년
이 소설에선 ‘골방철학자’를 정의하며 이와 같은 언어를 펼쳐 놨다. ‘골방’을 ‘책’으로 바꿔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책은 문화의 정수나 학문의 정수를 뽑아놓은 것이기에 그것만 익히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장자, 니체, 비고츠키, 김용옥 등을 읊어도 그건 뭔가를 알고 있다는 허영심만 채울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박동섭 교수가 이야기하듯 ‘백색의 앎(책)’과 ‘잡색의 삶(실제)’의 차이이며, 연암이 말하듯 ‘형사形似(책)’와 ‘심사心似(실제)’의 차이이다. 세상은 늘 변해 가는데, 지식은 좁디좁은 울타리 안에 몰아넣고 ‘변하지 않는 가치’만이 최고라고 역설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잡색의 삶’을 향해 나가야 하며, ‘심사’를 간파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공부를 떠나 세상을 향해 맘껏 부딪히고 관계와 부대끼는 경험의 장으로 들어가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꼭 ‘책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부정한다’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한 지식(기계사용 매뉴얼, 프로그램 사용법, 상식 등)과 같은 것은 ‘책을 통해 획득’해야 한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결코 책을 통해서만은 얻을 수 없다. 책을 통해 기본적인 배경은 깔되, 경험을 통해 실제와 끊임없이 부딪히며 깨우쳐 가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우린 지식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바꿔야 한다. ‘완전무결한 지식은 없다’는 것과 ‘지식은 획득이 아닌 깨우침의 과정’이라는 것으로 말이다.
이러함에도 세상은 여전히 책상머리에 앉아 사문화死文化된 내용만을 달달 외워 승승장구하길 바란다. 그래서 학생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10시간 이상을 학원이나 과외로 책상머리에 앉아 있게 된 것이다. ‘잡색의 삶’에 나가보지도 못했는데 처음부터 ‘백색의 앎’만을 고집하고, ‘심사’를 파악해본 적도 없는데 처음부터 ‘형사’만을 강요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지식과 삶의 괴리를 온 몸으로 감내하며 ‘골방철학자’처럼 박제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젠 더 이상 세상이 유포한 ‘거짓 지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과연 책을 볼 때에 어떻게 봐야 하는가?
무릇 책을 읽는 자는 반드시 단정히 손을 모으고 무릎을 끊고 앉아서, 공경히 책을 대하여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고 뜻을 다하며, 자세히 생각하고 익숙히 읽고 깊이 생각하여, 깊이 뜻을 이해하고, 구절마다 실천할 방법을 구해야 한다.
凡讀書者, 必端拱危坐, 敬對方冊, 專心致志, 精思涵泳, 深解義趣, 而每句必求踐履之方.
만일 입으로만 읽어서 마음에 체득하지 않고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책은 책대로이고 나는 나대로일 것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若口讀而心不體, 身不行則, 書自書我自我, 何益之有? -『擊蒙要訣』 「讀書章」
오천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 선생님이 쓴 『격몽요결』(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한 중요한 방법을 논한 글)의 한 구절이다. 조선시대의 학자들은 앎이란 획득되어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천지자연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라 인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자와의 소통에 참여하는 것이며, 천지자연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책을 편안한 자세로 읽는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데, 삐딱한 자세로 대화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율곡은 이 글의 서두에서 책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길고도 명쾌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말은 마지막에 있다. 책을 읽으므로 세상과 상호작용하고 자연의 흐름에 동참하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관계 속으로, 삶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경험의 장 속에서 나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느끼게 되기에, 책을 읽기 전과 후의 모습은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모습에 변화가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책은 책이오, 나는 나다書自書 我自我’라고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고백 자체가 ‘골방철학자’의 이상적인 앎처럼 무의미하며, 오히려 알지 못함만도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경험의 장에서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말로 ‘백색의 앎’이 ‘잡색의 삶’으로 바뀔 수 있으며, ‘형사’가 ‘심사’로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