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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Dec 25. 2022

사랑은 어렵다

받아들인다는 것

동료분이 MBTI와 관련하여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모두가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으니 어느 유형 하나 남들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다고. 그래서 신빙성 이전에 개인적으로는 MBTI에 고마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쟤는 왜 저래?'라고 낙인찍혔을 나의 특성이 '아, 쟤는 0000 유형이야'라는 식으로 이해받을 수 있으니까.


다만 살다 보면 이런 단편적인 이해만으로는 갈증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를 조금 더 총체적으로 받아들여줄 누군가를 갈구하게 된다. 이 욕구에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살포시 붙여본다. '사랑이란'으로 시작하는 문장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조금 그럴듯한 정의를 찾아내었다. 사랑이란 나를 덩어리째 수용하고 이해하는 행위다.


특정한 캐릭터성으로 누군가를 파악하고자 하는 건 대개 장르문학에서 자주 시도된다. 특정한 습관이나 말투, 헤어스타일, 패션 등으로 손쉽게 그 사람을 인지하고, 또 기억할 수 있다. 하나의 조각만으로 한 사람을 인식할 수 있으니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다. 퍼스널 브랜딩을 위시한 마케팅 분야에서는 오히려 권장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 브랜드 하면, 그 사람 하면 그거! 이렇게 한 문장만으로 떠올릴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나의 전부를 받아들이라는 건 사실 무리한 요구일지 모른다. 여기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니까. 과연 그게 가능한 사람이 있을까, 나 또한 누군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런 의구심도 든다. 물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간단하게 '당연히 가능하지!'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현실을 한번 찬찬히 살펴보자. 정말 그 사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 우선 나 자신조차 내가 온전히 수용하고 있는지.


받아들인다는 건 뭘까? 그냥 가만히 지켜봐 주는 걸까? 아니면 있는 힘껏 끌어안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걸까? 아니면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걸까? 사람이 다양한 만큼 사랑의 형태도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그래서 '전적으로'라는 말에 속지만 않는다면 실은 '받아들임'도 한 마디로 딱 정의 내릴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갖는 서운함과 거리감은 실은 사랑의 양이 아니라 방향의 차이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사랑을 하는 그 순간에는 이 모든 사실을 잊고 '내 방향에 상대의 방향을 맞추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내 상자 속에 욱여넣는다.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더라도 애써 무시하면서. 물론 반대도 성립한다. 둘 중 한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 곡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게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람은 믿지 않고서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니까.


그래서 사랑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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