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어 보세요
오래된 도시를 상징하듯 갖가지 흔적들을 간직한 보도블록에 내리쬐는 8월 말의 햇빛은 쨍쨍했다.
지도 어플로 찾아보니 집에서 도서관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낯선 길이지만 거의 직진이니 헷갈릴 일은 별로 없다.
베란다 창을 열고 손을 휘휘 저어보았다. 뜨거웠다. 최대한 옷을 가볍게 입고, 쪼리 샌들을 신고, 양산을 들고 나선 길이었다.
나는 어느 곳으로 이사를 가든 주민센터 다음으로 도서관을 방문했다. 일주일 정도 집안을 정리하고 나면 도서관을 중심으로 내 활동 구역을 만들어 갔다.
그날도 그렇게 나섰다. 천천히 걸었다. 보도블록 위를 걸어가는 내 발, 그리고 그림자를 만들어주는 양산, 그리고 고향 같은 도시에 다시 돌아온 나.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상당히 보람이 있는 일이다. 요즘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듣게 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쉽게 얘기하지만 그런 일을 선택하고, 선택당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첫째 조건이 되기도 한다.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은 몇 번째 조건쯤 일지.
어쨌든 나는 상당히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들이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필수조건이므로 대부분은 상당히 열심히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말 한마디한마디에 나타난다.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이다.
그렇지만 2단계쯤 되면 조금씩 해이해지기 마련이다. 그녀들은 조금씩 밖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대만에서 살다 한국에 오게 된 그녀는 감정이 하나도 없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남편은 1층까지 내려와 나를 맞이했다.
"주차는 이렇게 하세요, 비밀번호는 이렇게 됩니다." 그렇지만 나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 남편은 이미 센터로 전화를 해서 몇 차례 항의를 한 다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왜 빨리 선생님을 배정해 주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녀는 출산한 지 6개월 정도 된 상태였고, 한국말을 전혀 못했다.
보통은 빨리,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고 몸을 내 쪽으로 가깝게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이는데, 그녀는 의자를 쭉 빼고 몸을 뒤로 젖히고 억지로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꼭 말 잘 안 듣는 5살 같았다.
그런데 숙제는 빠뜨리지 않고 다 했다. 틀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종결어미, 날짜와 시간, 시제, 불규칙, 대중교통 갈아타기까지 매 단원을 어려워했다. 틀린 글자를 고칠 때도 성의 없이 대충 지웠다.
1단계의 절반쯤에서 그녀가 말했다. "나는 머리가 나쁘다." 나는 웃음이 났다. 그래서 칭찬을 많이 해 주었다. 지금까지 아주 잘해왔고, 잘하고 있다고. 발음이 아주 좋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조금씩 책상과 가까워졌다. 질문도 했다.
펜으로 '조금'을 가리키며 '좀'?, '근처'라는 단어를 가리키며 '가까워'?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내가 더 신이 났다.
밤에 일한다는 남편이 시간 내내 아이를 봐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35년 동안 그녀가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이상한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과 어떤 물건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다른 얘긴데, 그녀는 이상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휴대폰도 잘 이용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전자제품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나누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의 한국어는 조금씩 진전이 있었다. '몰라'라는 말은 금지어로 만들고 어떻게 해서든 문장을 만들어 내게 했다. 책도 많이 읽게 하고, 쓰게 하고, 단어를 찾게 하고 상대적으로 숙제를 많이 냈다.
어느 날부터 '캐러멜 마키야토'가 배달이 왔다. 남편이 아이를 보며 배달을 시킨 거였다. 뭐 드시겠냐고 물으면 내가 안 먹겠다고 할 것 같으니 그냥 주문한 거였다. 그다음엔 차가운 것이 좋은지 따뜻한 건지를 물었다. 난 따뜻한 것이 좋다고 했다. 그렇지만 난 '캐러멜 마키야토'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했다.
처음에 그녀는 손가락으로 커피를 가리켰었다. 그다음은 "선생님, 먹어요."였다. 그다음은 "선생님, 커피 드세요."였다. 그리고 나를 보며 웃었다.
- 아/어 보세요 : 동사와 함께 다른 사람에게 권유나 조언할 때
어간의 모음이 'ㅏ, ㅗ'일 때 '-아 보세요'/그 밖의 모음일 때 : '-어 보세요'/하다 일 때 '-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