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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녕 Sep 13. 2021

계산기 두드리며 닮아가는 인생

생존을 넘어 모험의 길로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마다 날 무겁게 만들어 주저앉히는 생각들이 찾아온다. ‘정말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결과가 안 좋으면 어떡하지?’ ‘지금 하는 방법이 잘못된 방법이라면? 괜히 시간만 낭비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며칠간 지속되고 나면, 이쯤에서 그냥 포기해도 되지 않냐는 유혹의 목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한다. ‘굳이 해야 해? 나중에 실망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지금으로도 충분하잖아. 그냥 편하게 살면 안 될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져왔다면, 이제 새로운 도전은 쉽지 않다. 웬만한 각오가 아닌 이상 새로운 일에 뛰어들기란 너무 어렵다. 날 주저앉히는 생각들을 물리치려면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를 설득시켜야 한다. 이쯤 되니 이제 생각의 무게만으로도 몸이 땅을 뚫고 깊숙이 가라앉을 것만 같다.


    어떻게든 겨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새로운 일에 뛰어들었다 해도, 마음속 꾹꾹 덮어놓았던 두려움과 불안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른다. 하던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거나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기면, 또다시 날 주저앉히는 생각들과 지난한 싸움을 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고민할 시간에 그냥 일에 매진했더라면 뭐라도 결과를 내긴 했을 텐데, 왜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까. 일을 해야 할 시간을 생각만 하면서 흘려보내고, 그걸 또 후회하면서 시간 보내고. 이런 바보 같은 짓, 어떻게 하면 그만둘 수 있을까.



머리로 계산기 두드리기


날 무겁게 만드는 생각들이 뭘 전제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봐야겠다. 결과를 걱정하는 걸 보니,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있다는 얘기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1등을 한다거나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는 것, 아니면 취업인 적도 있었다. 그렇게 도전 끝에 얻은 결실이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거나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아마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결과뿐만 아니라 방법도 걱정하는 걸 보면, 성공의 정석이 있다고 믿는 게 분명하다. 예를 들어, 토익시험에서 고득점을 맞는 게 목표라고 해보자. 혼자 공부하면 고득점을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수많은 문제집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도 고심해야 하고, 시간 내 모든 문제를 다 풀기 위해 어떤 전략이 유용할지도 잘 알아봐야 한다. 이런 팁들은 학원에 가면 전수받을 수 있다. 학원의 공부법은 단기간에 고득점을 받을 수 있게 특화돼있어서 그렇다. 짧은 기간 내 기출문제 위주로 풀기 때문에, 보통 3개월 정도만 학원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면, 700∼800점 이상은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시행착오는 가능한 한 줄이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지름길로 가야 더 빨리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제까지 ‘도전’이라고 할 만한 일을 과연 몇 번이나 했을까 싶다. 직접 해보지도 않고 생각으로만 시뮬레이션을 몇 번씩 돌리다가 포기한 적이 대부분이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에 비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이유가 컸다. 결국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기로에 설 때마다 계산기를 두드렸다. 내 시간과 돈을 투자했을 때 얼마큼의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지 반복해서 따졌다. 계산 끝에 도전할 수 있었던 건, 항상 안전하고 편한 길, 손해 보지 않는 길이었다. 계산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도전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계속 만들어 나에게 들이밀었다. 이러니 도전이 쉬울 리가 있나.



    어쩌다 도전을 시작한다 해도 산 넘어 산이다. 구체적인 목표와 촘촘한 계획이 딱 버티고 있으니, 하루라도 계획대로 실천하지 못하면 온갖 망상이 가동된다. 스스로에게 실망했다가 '하루쯤이야 조금 농땡이 부려도 괜찮잖아. 내일부터 열심히 하면 돼지'라며 다독여도 보고,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도 한다. 그날의 망상의 결론은 계획이다. 내일부터 목표까지 남은 일수에 맞춰 하루당 해야 할 일을 다시 할당한다. 그러면 오늘 못한 게 쉽게 만회가 될 것만 같지만, 더 빡빡해진 일정은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올 뿐이다. 매일 벌어지는 우발적 사건들과 내 몸과 마음에서 시시각각 벌어지는 일들을 무시한 채 균등한 계획을 세운 탓이다. 그렇게 매일이 반복되고, 하루에 해야 할 일의 양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날 짓누른다.


    이쯤 되니 계산기를 두드려 사는 방식이 내게 진짜 이로운지 의문이다. 게다가 다수가 선택하는 지름길은 돈과 인정을 얻는데 매우 효율적이고 손쉬운 길일지는 몰라도, 개개인의 몸과 마음을 이롭게 하는 길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다. 길은 좁은 길 하나인 반면, 각자의 기질, 생각, 경험, 처한 상황이 모두 다르고, 또 매 순간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 용기와 모험을 지닌 존재


공포, 우리에게는 예외적인 것이지. 오히려 용기와 모험, 미지의 것과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것에 대한 희열, 내게는 용기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 전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더할 수 없이 거칠고 용기 있는 짐승들을 시샘하여 저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장점을 빼앗고 말았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18, 498쪽)


    생존을 위협받을 때 느끼는 감정, 공포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감정이다. 먹고 살 돈이 떨어지는 공포와 마주하면, 안전한 미래를 위해 돈을 저축하게 된다. 남들이 퍼붓는 비난 때문에 나 혼자뿐이라는 외로움의 공포와 마주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따지지 않고 온전히 받아줄 수 있는 안전한 사람을 찾게 된다. 나를 보호하고 내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안전한 길을 찾는 건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그것만이 삶의 전부일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다. 이전의 관습을 의심하고 부정하면서, 또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에 도전하면서 항상 새로운 길을 열어왔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기계를 이용해 동물이 가진 힘을 뛰어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비행기의 발명으로 새처럼 하늘을 날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게 됐다. 컴퓨터 하나로 세상의 모든 지식에 접근할 수 있고 스마트폰으로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달에 우주선을 보내기도 하고, 심지어 사람의 장기를 이식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혁명을 거듭해온 역사가 보여주는 건, 인간은 공포를 넘어서 미지의 길을 가는 용기와 모험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확실한 결과를 원하면 원할수록, 오히려 원대한 비전은 가질 수 없다. 수학자가 이제까지 아무도 못 푼 수학공식을 풀어보겠다던가, 과학자가 우주의 암흑물질의 정체를 밝혀보겠다던가, 철학자가 시간과 공간의 비밀을 풀어보겠다던가, 수행자가 붓다와 같은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는 길은 ‘내 생애 반드시 결과를 보고 말 거야’라는 마음으로는 절대 갈 수 없는, 모험의 길이다. 모험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어떤 일에 뛰어들 때, 그 일이 내게 돈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외면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돈과 사람들의 인정보다 매번 다른 시도 속에서 문제를 맞닥뜨리고 극복하는 경험이 내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고 실천으로 옮길 용기 말이다. 결과나 목표보다 용기와 모험에 집중하는 삶이 바로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에 머무는 삶이 아닐까. 무엇이 되든 간에, 어떤 우연과 맞닥뜨리더라도 매 순간에 집중하는 그런 삶 말이다.



각자의 길이 보여주는 희열과 가치


3년 전, 김민섭 작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시간강사로 일했던 그는 가장 합리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대학에서 부조리한 일들을 경험한 뒤, 그 일들을 기록한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출간했다. 그리고 며칠 후 대학에서 일하길 그만두었다. 대학이 아닌 세상에서 공부를 이어나가면서 대리기사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리사회』라는 책을 펴냈고, 지금은 작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강연 플랫폼을 운영하는 스타트업, ‘북크루’의 대표이다. 그의 변화무쌍하면서도 자유로운 삶이 부러웠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고, 하나의 끝이 또 다른 시작을 불러오는 그런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에게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꿈꾸지만, 결과를 알 수 없으니 두려움에 붙잡혀 선뜻 그렇게 살겠다고 나서기 어렵지 않냐고도 되물었다. 그의 답변은 “저도 두려워요”였다. 의외였지만 진솔한 대답이었다. 그도 미래를 알 수 없는 건 두렵구나. 하지만 노동을 하고 글을 쓰고 책을 펴내면서,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고 함께 하는 그 모든 우연들이 지금까지 했던 어떤 일보다도 즐겁고 가치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지금 사는 방식이 자기 자신에게도, 사회에게도 가치 있는 방식이라고 믿는다는 얘기와 함께.



    그가 어떤 의미로 사회에게도 가치 있는 방식이라고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처럼 남들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누군가는 ‘이런 길도 걸어갈 수 있구나’하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한 직업만으로 정형화된 길을 꼭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면서 말이다. 개인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내 인식, 내가 맺은 관계, 내가 놓인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움직이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누구라도 가는 길을 걸으면, 자기 자신과 점점 괴리될 건 불 보듯 뻔하다. 내가 매 순간 다가오는 우연들에 열려있고, 자기 체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내가 걷는 길이 변화무쌍하고 유일무이해진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 속에서 맛보는 희열과 나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이롭다고 느끼는 가치는 나만의 모험이 가득한 길에서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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