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년도는 양극화가 심하다. 학력 수준에서부터 생활 습관까지, 순한 학생들은 순하고 말괄량이들은 에너지가 과다하다. 사춘기 직전인 학생도 있고 한참 어린 학생도 있다. 그중 눈에 띄는 학생 네 명이 있다. 모든 양극화 지표에서 '나를 매우 힘들게 함'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이름도 자주 불리고 눈초리도 자주 받는다.
자기들도 그게 익숙할 테지만 조금만 뭐라 하려 치면 굉장히 억울해한다. 그렇다고 바뀌는 게 있는 건 아니다. 자리에 앉아라거나 써라거나 때리지 말라고 얘기하면 시늉만 하다 금세 반복하고 만다. 1학기 땐 불러다 따끔하게 얘기하면 울기도 곧잘 울더니 2학기에는 아예 듣지도 않고 오히려 큰 소리로 '아 알았다고요' 할 때가 있어 당황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현장체험학습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도 장난이 심하길래 좀 퉁명스럽게 얘기했더니 반항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속으로는 이번이 마지막으로 참아 주는 거라며 세 번째 손가락까지 접곤 돌아 앉았다. 잔뜩 벼르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감정이 어디 한 구석에 쌓아 뒀던 터라 정말 한 번만 더 건드리면 터지기 직전이었는데 다음 날 일이 터졌다. 아무렇지 않은, 해맑은 얼굴로 곁에 와 나를 도와주는 넷. 그래, 이런 애들이었지.
언제나 문제는 나였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잔소리 듣는 건 싫은 일이고 그 감정을 표정이나 말투로 드러냈다고 화가 나서는 안 되는 건데. 나에게 반항한 게 아니고 그냥 당연히 들었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표현했을 뿐인데 그게 너무 날것이라 당황스러웠나 보다.
나의 가장 고질적이고 심각한 직업병이 이런 거다. Control Freak. 기껏 커봐야 나만한 아이들이라면 힘으로 제압하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인내하고 이끌어 줘야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아이들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해 안달일까.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스럽기 때문에 문제 행동을 중단시켜야 하는 건 맞지만 불친절함의 이유가 될 순 없다. 그냥 그 반항이 꼴 보기 싫은 거다.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하고 감정을 채에 거르지 않은 채 발산하는 생기발랄함이 하도 묵직해 거부감이 들었다. 웃어른에 대한 예의, 사회에서 지켜야 할 여러 규범 안에 아이들을 욱여넣고 통제하려고 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옛날 미국에는 어른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한다. Children are not to be heard but to be told. 이 말을 들었을 때 뜨악하며 미국 꼰대들을 한껏 비난했었는데 나도 다를 바 없었다. 명령 어조에서 청유 어조로 바꿔 주는 그 단순하고 작은 배려를 베풀지도 못하면서 그들을 비판했던 게 꼴사납다.
따뜻하지만 단호하자며 다짐하고 교사의 꿈을 키웠는데 정작 현장에서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30년 남은 세월이 막막하기만 하다. 교단에 서면 설수록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작아져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지만 나 또한 변화는 없다. 오늘도 '이렇게 말할 걸', '공감 먼저 해줬어야 했는데', '들어줬어야 했는데' 하며 자책만 하지 내일이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 잘 안다.
나도 사람인지라 매번 새롭게 다짐하며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나에게 수없이 먼저 손 내미는 아이들이 있기에 영 희망이 없지는 않다. 하루 전날까지 꿍해 있다가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기만 해도 이내 마음을 재정비한다. 내일이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 잘 알지만 내가 아니라 내게 주어진 아이들을 믿기에 30년, 거뜬하지는 않아도 흐뭇하리라는 것도 너무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