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 욕망’이라고 써도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인정과 욕망’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인정’과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어서이다.
이 글의 결론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친애하는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인정과 욕망’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욕망’이라 불리는 것을 욕구나 충동(urge)이나 의도와 구분하는 것이 유용하다면, 그것은 욕망이,
⓵항상 상상에 기반하고,
⓶그 자신을 사회적 관계(실제적인 것이든 상상적인 것이든)를 향하도록 하고,
⓷그 사회적 관계가 일반적으로 어떤 종류의 인정 욕망을 수반하고 따라서 자기의 상상적 재구축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사회적 관계를 파괴할 위험을 가진, 혹은 그것을 어떤 종류의 끔찍한 충돌로 이끌 하나의 과정이다.
이런 정리는 적어도 ‘욕망’이라는 단어가 현대 소비주의(소비주의는 모두 상상적 쾌락에 대한 것이라고, 그리고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에 대한 것이라고들 한다)에 대해서 연구하는 작가들에게 그토록 인기를 가지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인정’과 ‘욕망’과 관련하여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정리를 통해서 나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욕망’이라 불리는 것을 ‘욕구나 충동(urge)이나 의도’와 구분하는 것이 유용하다.. 고 여기기에 그 둘을 분리하여 생각하려 한다.
2. 욕망은, 그것이 인간 본성이든 어떻든, 상상에 기반하기에, 상상은 사회적 관계를 향하도록 하기에, 나는 ‘상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상상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는 점에서, 그 상상이 ‘욕망’의 성격을 결정할 것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관계를 ‘충돌과 ‘파괴’로 이끌 상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은 ‘충돌’과 ‘파괴’를 넘어설 수 있는 상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또한, 소비주의(상상적 쾌락, 정체성 구축)에 대해 경계하려 한다.
3. 더 나아가 나는 ‘욕망’보다 ‘욕구나 충동, 의도’에 기반하는 생활을 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나의 입장을 ‘인정 욕망’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충돌과 파괴’로 이끄는 ‘관계’에 이르지 않는 한에서의 ‘인정’에 만족하려 한다. 인정의 ‘욕망’이 아니라 인정의 ‘욕구, 충동, 의도’에서 만족하는 인정을 요구하고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 아닌 욕구에 따르려는 생활 태도는 ‘인정 욕망’뿐만 아니라 화폐를 포함한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망의 경우에도 적용될 것이다.
이러한 주체적인 생활은 앞서 <2015>와 <변곡점>이라는 글에서 2015년에 했던 생각들이라고 밝힌 것들과 다르지 않다.
나는 그와 같은 주체적인 생활을 슬기롭다고 여기며, ‘소박한, 단단한, 즐거운’과 같은 단어들과 연관될 것이며,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는’, ‘소유하지 않는 소유를 꿈꾸는’ 생활이기도 할 것이다.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권력), 물질적인 것들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부) ‘상상된’ ‘욕망’에 따른 ‘충돌과 파괴’를 줄여나가려는 주체적인 생활방식일 것이다.
자본이 쌓아 올린 탐욕의 ‘전쟁과 수탈(자연)과 착취(노동력)와 폭력(차별)과 소외(관계)’를 허물어가는 가능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23. 11. 25.
*<가능성들-위계·반란·욕망에 관한 에세이>(Possibilities–Essays On Hierarchy, Rebellion, And Desire(2007),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황희선, 최순영, 조원광 옮김, 그린비 2016, 105-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