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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치 Dec 01. 2024

2번 여사제 The Highpriestess

그녀가 품은 신비로운 비밀은?



타로카드의 0번 바보가 마법사를 걸쳐 여사제 또는 여교황을 만나게 됩니다. 바보는 열린 마음과 빈 손으로 여러 인물을 만나면서 삶의 진실을 배워나가죠.


2의 수비학적 의미로는 분리, 결합(합일)을 말함과 동시에 서로 반대되는 두 뜻에서 숨겨진 이면인 이중성이라는 의미도 덧붙여집니다.


마법사가 하늘의 뜻을 현실에 창조하는 물질적 지식을 주는 태양의 남자라면 여사제는 정신적인 가르침을 주는 달의 여자입니다.

즉 1의 마법사가 태양과 빛의 남자라면 2인 여사제는 달과 그림자의 여자예요.


태양(양)이 외향적이고 감각적, 물질적인 성질이라면 달(음)은 내향적, 직관적 정신적인 성질을 의미합니다.






달은 빛이긴 하나 그 배경은 어둠입니다.

흑백의 두 기둥이 빛과 어둠으로 동전의 앞뒷면의 이중성을 나타내듯이 말이죠.

여사제는 책을 들고 있듯 지적이고 세련된 차도녀이지만 속은 직관적이며 영감이 풍부한 반전매력의 여자고 볼 수 있죠.

 어둠의 배경에서 영롱한 영감이 와 달빛인 지식이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숨겨진 위대한 진리를 수호하듯 토라라는 책을 꼭 쥐고 침묵 속에 있습니다.

그녀 뒤에 쳐진 베일에는 석류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보통 석류는 풍요와 다산, 임신을 상징합니다.

여기에선 껍질에 반쯤 가려진 석류로 어림보아 임신을 할 수 없는 불임을 뜻함과 동시에 남자사람이 아닌 신과 결혼한 순결한 성녀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고매한 만큼 높은 직위를 가진 신녀처럼 비밀스럽고 신비한 존재는 없죠.


과거에는 여자가 책을 보거나 신묘한 통찰력이나 번뜩이는 재능이 있을 때 마녀취급을 당했어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평범한 생활에 자신을 허비하듯 가장해야 했어요.


특히 중세 암흑시기는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고 생각했죠.

책을 읽으면 생각하게 되고, 사고하게 되면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되거든요. 우월한 남성 중심주의 사회에서 책 읽는 여자는 자신이 속한 세계의 맹점에 대해 의심을 품고, ‘왜’냐고 질문을 던지는 편한 존재였습니다.



요즘에서야 오만과 편견의 날이 무뎌져 여성목사가 생겨날 정도가 되긴 했어요.

그러나 남혐 여혐의 면도날이 베며 서로를 축소키는 부작용도 생겼어요.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듯 서로를 인정해야 할 것이에요.

<장자>라는 책에 어떤 사람이 걸을 때마다 자신의 발소리가 귀에 거슬려서 힘들어했어요. 요즘 층간소음처럼 과민해지는 것처럼요.

그는 그 소음이 자신의 그림자에서 나는 것 같아 빨리 뛰어 사라지게 하려다 그만 숨이 가빠 죽고 말았어요. 그냥 나무그늘에 가면 소리가 멈추었을 텐데 말이에요.


나와 그림자는 하나예요.

그렇듯 남성과 여성도 하나입니다.


영성계의  뉴에이지 한쪽에서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땅인 어머니를 신성화시키는 추세도 있습니다만 남성과 여성도 둘이 분리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면에 여성성과 남성성(분리)이 하나로 녹아 통합(결합)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존재(하나) 되지요 






푸른 휘장이 표면의식이라면 반쯤 가려 좀체 분간하기 어운(?) 푸른 배경의 물은 깊은 무의식과 잠재의식이에요

기껏 가린 게 잔잔한 물이 아니지요

두 기둥과 베일로 가릴 정도로 아주 깊은 심연의 무의식입니다.

그 물은 하늘과 닿아 있습니다.

하늘이 신이라면 물은 하늘이 낳은 생명이요 분리된 개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의 에고(ego)는 신으로부터 분리되어 개체인 것처럼 살아내야만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 물(무의식)은 항상 하늘(신)과 분리되듯 선이 그어있지만  그 선은 하늘(신)과 붙어 하나입니다.


분석심리학자 융은 본래부터 인간 고유의 보편적인 무의식의 심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칭했습니다.

그 층층의 집단무의식 중에는 종교적으로 말하면 신과의 합일, 또는 신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의 열망이 일례의 대표이지요.


베일을 벗기고 흑백의 기둥으로 세운 선악의 모든 개념 너머를 바라본다면 존재의 불가사의와 경이와 신비로움 속으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여사제는 우리로 하여금 내면의 자각 차원에서 흑과 백, 선과 악, 빛과 그림자 등등의 이중성을 수용하는 삶이야말로 온전한 삶이라고 침묵으로써, 그윽하고 부드러운 존재감으로 그 비밀을 일별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2번 여사제 카드는 하나(합일)이면서 둘(분리)인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모호하면서 분명한 이치이지요;;





여사제의 왕관을 보면 가운데 보름달을 중심으로 양 옆의 뿔의 형상으로 상현달과 하현달이 있고, 그녀의 발은 초승달을 밟고 있습니다.

달은 내향적 직관적 정신적인 것과 더불어 깊은

무의식을 나타냅니다.

변화주기가 있어 달의 변화와 더불어 생리적 주기와 임신과도 관련이 깊지요.

옛날에는 물을 떠놓고 달을 보며 아들을 비는 사람도 많았더랬지요.

착하고 순하던 여자들도 생리기간에 예민하다 못해 까칠해지지요. 마치 상현달 초승달들처럼 뾰족해지기 일쑤입니다.

상대 남자들은 어찌하지 못해 쩔쩔매다 그 기간엔 슬슬 피하기도 해요.


초승달이 보름달로 차오르는 것처럼 달은 풍요로움과 정화의 상징이기도 해요.

자신의 뾰족하고 예민한 초승달의 면을 잘 들여다보면 다만 날이 선 것이 아니라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일 뿐임을 알게 될 거예요.


마법의 날에 여사제는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묵직하고 먹먹한 원초적인 착잡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증상을 겪었는데 생리 때는 더 심을 거예요.


그건 살아오면서 생기는 상처와는 무관한 것이었을 테니까요.


이  느낌은 무얼까? 그 먹먹함에 침잠하면 절로 명상 비슷한 상태가 되어 분리된 외로운 존재라는 인식을 확인하게 되었어요.


그건 연인을 만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 관계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건 나자신과의 관계였어요.


자연 그대로의 원형의 내가 아닌, 개성이 붙여지고 성격이 덧씌워진 개체성에 대한 안감,  그 불완전함에 대한 의이 흔들어 깨웁니다.

그 느낌을 각색 없이 있는 그대로 느끼다 보면 왜 불안과 죄책감을 느끼지는지에 대한 원인이 떠올랐


아마 어롔을 때부터 종교를 믿기 전부터  신 꼈을 거예요.

그리고  무의식 죄책감은 신으로부터의 분리감.


내 안에 임재하는 신,

신의 아들로서의 나 자신과의 관계의 단절이라고 할까요.

그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꿉꿉한 내면의 화로써 환기가 일어니다.

문제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은 곧 나만이 그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기쁜 소식 아닐까요~


ㅡㅡㅡ


이제 마무리말

달의 표면에서 반사된 태양빛 덕분에 우리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이지러질 때나 보름이나 달은 실제 동글동글 원만합니다.

우리 내면본래의 달의 원형을 인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항상 자신이 슈퍼문임을 잊지 마세요. 속닥속닥.

이상 여사제의 천기누설 무릎팍 치는 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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