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절데뷔전 10
사람은 확실히 적응의 동물이다.
첫날은 괴로움에 허덕이느라 누구와도 소통하고 싶지 않았는데
둘째 날이 되니 코가 막혀 있는 상태가 조금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물론 잠은 여전히 거의 자지 못한다.)
이제 밥 먹을 때도 숨이 막힐 정도로 힘들지 않아서
최불암 선생님이 될 일도 없다.
붓기가 조금 가라앉으니 입도 조금 더 벌려져서
음식을 씹는 일도 덜 힘들다.
조금 살만하니 커피 생각이 간절해진다.
내 이웃 정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건 둘째 날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화장실을 가려고 나섰고, 정은 어딘가 다녀오는 길이었다.
나는 먼저 인사를 건넸고, 정도 반갑게 인사를 받아줬다.
그다음은 아침을 먹고 난 뒤였다.
나는 한 손에 링거를 꽂고 있어서 식판을 내놓으려면
한 손으로 식판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링거 거치대(?)를 끌고 가야만 했다.
기운도 없고 움직이는 것도 아직 힘이 들어 나 몰라라 식판을 그대로 뒀는데
그걸 본 정이 다 드셨냐고 묻더니 아무렇지 않게 정리를 해주었다.
나는 미안하고 고마웠다. 다소 나이롱환자 같아 보이지만 어쨌든 그도 환자 아니던가.
고마운 마음에 냉장고에 있던 귤을 두 개 건넸다.
먹는 걸 좋아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은 몹시 좋아하며 받았다.
그렇게 우린 진짜 이웃이 되었다.
아침도 먹었고 드레싱도(드레싱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일단 넣어둔다) 하고 조금 쉬려는데
정이 묻는다.
"커피 마실래요?"
나는 괜찮다고 여러 번 사양했지만, 자기 가는 길에 사다 주는 건 어렵지 않다고 굳이 커피 취향을 묻는다.
나는 마지못해 카페라테를 말하고야 만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카레라테와 레몬음료까지 받아 든 나는 고마움에 어쩔 줄 모른다.
1층에 있는 카페베네(언제 적 카페베네인지) 커피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 음료까지..
나는 뭐라도 보답을 해야지 하고 마음먹는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서로의 사연을 나누게 된다.
나는 자전거를 타다가 꼴사납게 자빠져서 코와 눈뼈가 부러졌다고 설명한다.
정은 안타까워하며 자전거의 위험성에 대해 한참 이야기 한다.
나의 사연도 내겐 너무 큰 사건이었지만,
정의 사고는 더 아찔하다.
소매가 아래로 늘어지는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서 라면을 끓이다가
그만 소매에 가스불이 붙어버렸다는 거다.
소매에 불이 붙은 걸 뒤늦게 알아차렸고 급한 마음에 옷에 물을 뿌렸지만 쉽게 불이 꺼지지 않았단다.
놀란 아들이 옷을 벗으라고 소리쳐서 그제야 옷을 벗었지만 이미 꽤 많이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고...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을지 걱정스러워하는 내게 정은 덤덤하게 웃어 보인다.
지금은 통증은 거의 없는데 고압산소치료를 받기 위해 며칠 더 입원해 있는 거라고 한다.
비용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은데 회복이 훨씬 빠른 치료 방법이란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짧은 우정은 서로에게 먹을 걸 주고받는 걸로 이어졌다.
정의 이름을 '정'이라고 지은 이유는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정은 정말 "정(情)"이 많은 사람이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과 밝은 목소리로 대한다.
내가 늦게까지 잠을 못 자고 뒤척이고 계속 일어나 물을 마시고 한숨을 쉬어대서
잠을 설치지 않았는지 걱정하면,
자기는 잠들면 아무 소리도 못 듣는다며 나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나는 내가 목이 말라 벌떡 일어나 물을 마실 때마다 정이 뒤척이는 걸 느꼈다.
고마운 사람, 먹는 일에 열정적인 유쾌한 사람, 정.
그런 사람이 내 이웃이 되다니!
나는 역시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