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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도 Mar 18. 2020

시골 병원

서울 사람의 시골 병원 체험기

재작년 절에 처음 발은 디딘 이후로 절 생활과 더불어 시골 생활에도 매료되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항상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나는 방에서 방으로만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는 곳에서 나와 흙을 밟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밭에서 자란 오이를 오늘 먹을치만 따와서 씻어먹는 재미, 날이 좋으면 자연스럽게 빨래에서 나는 볕의 냄새를 떠올리는 게 좋았다.



지난겨울 절에서 지내고 있던 중 심하게 감기가 걸렸다. 잘 먹고 잘 쉬면 된다기에 배 든든하게 채우고 온돌방에서 몸을 지져보아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시내 병원에 가게 되었다.



병원에 들어가니 똑같은 파마머리를 한 언니들이 있었다. 그들은 젊은 언니가 병원에는 무슨 일이냐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서울 날씨는 어떤지를 별 의미 없이 질문으로 던진 후 자신들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지막으로 서울은 간 게 언제며 거기서 무엇을 봤고 무엇이 좋고 거기를 가지 않고서는 서울 갔다고 말할 수 없다는 둥 중간중간 나를 대화에 끼워주는 척은 했지만 사실상 내가 빠져도 아무도 모를 듯했다.



대화의 틈을 파고들어 어렵사리 접수를 마친 후 진료를 받고 수액 처방을 받았다. 처치실에 입장하니 온 침대가 할머니 할아버지로 이미 만석이었다. 겨우 자리를 찾아 누워 있으니 아까 접수대의 파마머리 언니 중 한 명이 들어왔다. 내 팔을 걷어 주사 바늘을 넣으면서 오랜만에 젊으니 팔에 주사하니 탱탱하니 아주 좋다고 했다. 내 양 옆에 가득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아주 우습고 솔직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치실을 나가기 직전 파마머리 언니는 서울에서 어디 대학을 다니냐며 물었다. 무례한 질문이라고 느낄 수도 있었으나 탱글탱글 파마만큼이나 발랄한 언니의 말들을 이미 너무 좋아하게 되어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 졌다. OO대학이요. 이번에는 온 병원이 들썩거렸다. 할머니 OO대학 알아요? 할아버지 손주가 어디 대학이라 그랬지? 내가 대학 다닐 때 거기 자주 놀러 갔는데. 그럼 그 집 아줌마 딸도 알려나? 등 아무 연관성이 없는 듯 아닌 듯 아주 중요한 듯 아닌 그런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는 어느 순간 모든 이야기를 매듭짓지 않을 채 쏙 빠져나가 버렸다.



이건 흔히들 말하는 팍팍한 서울살이를 하던 나에게는 너무도 새롭고 소중한 반짝반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도 언젠가 빠글 머리를 한 발랄한 언니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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