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비록 별 볼 일 없이 군대 생활을 마쳤지만, 여러분은 남은 군 생활 멋지게 하시길 바랍니다."
2023년 10월 4일, 후임들에게 애틋한 메시지를 날린 뒤 나는 군대라는 속박에서 벗어났다.
사람들은 입대하면 어른이 되어서 전역한다고 말했다. 적어도 나는 더 멋진 모습은 아닐지라도 철이 들어 전역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엄마는 군대에서 정리 잘하는 사람이 되어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끝내 그런 습관을 들이지 못했다. 예전에는 군대 갔다 오면 ‘각이 섰다는데’ 나는 군대 18개월을 마쳐도 철이 든 것 같지도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 “
군대에서 나오자 세상에 버려진 느낌이 들었다. 어디 갈 곳이 없었지만, 예전처럼 친구들을 만나 게임하고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자꾸 그런 생각이 반복적으로 들었다.
군대도 바꾸지 못한 내 삶을 바꿀 만할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고 싶었다. 누나가 인도여행을 가라고 권했다. 나는 초등학교 5학기를 인도에서 지냈고, 아빠와 인도여행을 다닌 적이 있었지만, 혼자 인도에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누나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자리에서 무작정 인도행 항공 티켓을 끊었다. 뭄바이로 가는 편도 항공티켓이었다. 크게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크게 가지 않을 이유도 없어 나는 인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베트남항공기는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무작정 간 거라 큰 준비를 하거나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생각지도 않은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다만 특별한 것은 인도여행을 마칠 때 누나랑 히말라야 트래킹을 하자고 약속했다.
히말라야를 떠올리자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회사에 다니는 누나도 히말라야 트래킹이 꿈이었다. 7년 전에 대학에 다니던 누나는 인도에 갔다가 히말라야에 갈 예정이었는데 아빠가 수술을 받아야 해서 돌아와야 했었다. 그래서 못 간 것이 한이었는데 동생과 같이 가게 되었다고 나보다 더 신나 했다. 히말라야 ABC(Annapurna Base Camp) 코스는 누나와 나의 꿈이었었다.
"살면서 한번쯤은 히말라야지"
누나의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 드높은 설산을 내 가슴속에 품고 싶었다. 에베레스트, 마추푸차레, 안나프루나의 설산이 내 가슴속에 들어오자, 인도여행도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나와 누나는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만났다. 이미 나는 인도에서 50일간 뭄바이와 푸네, 델리, 바라나시, 자이셀메르 등지를 여행 다녀왔다. 인도와 한국 친구를 만나고 인도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을 만났다. 나는 그 생활이 지치고 힘들 때 누나와 만나기로 했다. 누나는 서울에서 방콕을 거쳐 카트만두로 왔고, 나는 뭄바이에서 비행기를 탔다. 우리는 카트만두에서 만나 버스를 타고 포카라까지 9시간의 드라이브를 했다. 별로 권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길을 좋지 않았고, 심지어 포장되지 않은 도로도 많았다. 도로 옆으로는 천길 낭떠러지가 즐비했다.
카트만두-포카라 가는 버스
포카라에 도착한 우리는 목숨 건 여정을 위해 하루 푹 쉬었다. ‘산촌다람쥐’에서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윈드폴로 돌아왔다.
산촌 다람쥐에서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윈드폴 게스트하우스에서 취침
포카라의 밤은 꽤 추웠다. 다른 것보다 마르지 않는 내 빨래들이 걱정이었다.
"내일이면 마르겠지."
걱정은 접어두고 일단 잠을 청했다. 손빨래를 조금만 더 빨리할 걸 하고 후회가 되었다. 아침이 되어 확인해 보니 빨래가 하나도 마르지 않았다. 빨래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어쩌랴. 안 마른 채로 그냥 가져가기로 했다.
지프차에 올라타기 전에 사진
"얘들아, 최근에 어떤 한국인 청년이 샤워하다 죽었대. 트래킹 하면서 웬만하면 샤워하지 마!"
지프차에 올라타니깐 윈드폴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말해줬다. 샤워를 하거나 머리를 감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그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몸은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물이 많지 않은 곳이라 도는 말일 테지만 겁부터 났다.
"첫날 우리는 고래파니에 가요."
우리의 포터 "딜"이 앞으로의 여정을 설명했다. 딜 앞에서 힌디어를 몇 마디 사용했더니 더 친근하게 대했다. 인도학과를 다니는 사람이 힌디어 몇 마디 말하는 게 대수일까. 네팔 사람들은 힌디어를 메인으로 사용하진 않았지만 내 짧은 힌디어를 잘 이해했다.
2년 전 한라산에 오르던 일이 떠올랐다. 성판악에서 백록담을 다녀오는 길은 왕복 20km 가까이 되었는데 눈발이 몰아쳐 무척 힘들었었다. 백록담은 영하 30도쯤 여겨지는 추위와 바람이 몰아쳤고, 바람으로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었다. 그때 백록담은 ‘얼음의 궁전’ 혹은 ‘바람의 놀이터’였다. 누나와 나는 그런 곳을 다녀왔을 정도로 등산에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날에 반단티에서 고래 파니까지 3시간을 걷고는 의기양양했다. 첫날에 걷는 게 별게 아니어서 ABC코스를 우습게 본 것은 착오였다. 히말라야는 엄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Everything, Okay?"
딜이 우리의 상태를 계속 확인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오만하게 자신감을 드러냈다. 딜은 그냥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마치 나를 어린애처럼 여기는 것 같아 기분이 조금 언짢아졌다. 그래도 우리를 지켜주는 포터이니 어쩔 것인가? 나는 말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포터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처럼 자만심을 잔뜩 가진 사람들의 결과가 어떤지를. 나는 바로 어제의 오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고래 파니 롯지
ABC코스의 위기는 항상 저녁마다 찾아온다. 난방시설 하나도 없는 롯지에서 하룻밤 자는 건 고문받는 것과 같았다. 가져온 컵라면에 피자를 시켜 먹으며 몸을 따뜻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리 옷을 많이 껴입어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어나 체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허리를 스트레칭했는데, 나는 그만 허리가 삐고 말았다. 이건 보통 사고가 아니었다. 오르지도 못한 채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민스러웠다. 군대에서 허리를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게 문제가 된 것 같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ABC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일단 가지고 있는 핫팩을 허리에 두르고 파스를 붙였다.
둘째 날 우리는 푼힐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일어날 때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몸 상태가 되어 있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해발 3200m이면 호흡이 곤란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푼힐에 기어올랐다.
푼힐에서 보는 일출은 아름답다
일출만 보고 다시 고래 파니 롯지에서 밥을 먹고 췰레까지 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내가 무거운 걸 들면 안 될 것 같으니 포터인 딜이 들어주었다. 허리 보호대를 차고 파스를 두 장씩 붙이고 허리 주변에 핫팩을 고정시켰다. 기필코 완주하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하룻 만에 걷는 속도가 반이나 줄어버렸다. 12킬로를 매고 있는 딜이랑 같은 속도로 걸으니깐 그 반절을 매고 걷는 내가 부끄러웠다. 네팔의 산은 봄처럼 따뜻했다가 이내 겨울 날씨로 바뀌고는 했다. 더워서 옷을 벗고 있다가 우박이라도 떨어지면 즉시 옷을 껴입어야 했다. 추위 속에 몸서리치게 떨다 보면 기분이 진짜 나빠졌다.
눈이 오다가 그 눈이 바로 녹을만큼 더웠던 하루
"진짜 머리 감고 싶다."
"그런 말 하지 마. 내 머리엔이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누나와 나는 그런 말을 하며 신세타령을 했다. 땀 흘린 뒤에는 추워졌고 이내 컨디션이 나빠졌다. 산을 기어오르면 입고 있는 옷이 땀으로 젖었다가 잠시 쉬면 그것이 썬득거렸다. 당장 샤워하고 싶었다. 하지만 샤워도 할 수 없었고 갈아입을 옷조차 한 벌밖에 없었다.
"너 속옷 못 갈아입으니깐 누나 ‘팬티라이너’라도 붙이고 있어"
누나가 말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팬티라이너라는 말을 들어보았다. 대충 팬티에 붙이는 것이니 말하자면 기저귀 같은 것이었다. 살다 살다 남자인 내가 팬티라이너를 붙여볼 줄은 몰랐다.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볼까?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국밥 같은 달밧과 고추장의 콜라보는 대단하다
한국인이 먹으면 무조건 힘이 나는 음식이 "달밧"이다. 인도에서는 "탈리"라고 부르는데 네팔에서는 "달밧"이라고 불렀다. 엄청 많은 밥과 야채와 카레, 그것을 다 먹으면 리필을 해준다. 네팔사람들은 친절하다. 국밥 같은 달밧을 먹으니 그래도 힘이 났다.
걷다 보면 보이는 지도
지도를 유심히 보다가 우리가 걸은 동선에 의문이 생겼다.
"누나 고래파니에서 푼힐(3200m)을 갔다가 왜 췰레(2300m)로 온 거야?"
"아니 우리가 돌아온 것이 아니라 푼힐에 들렀다가 온 거야. 푼힐 멋지지 않았어?"
누나가 말했다. 뭔가 속은 느낌이 들었다.
“푼힐 안 들렸으면 7박 8일이 아니라 5박 6일이면 되었을 거 같은데...”
나는 아쉬움에 그렇게 말했다.
“좋게 생각해. 푼힐까지 돌아와서 덜 힘든 거야. 그렇잖았으면 고산증이 더 심했을 거야.”
푼힐은 ABC코스 걷다가 들리는 코스가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내서 다녀오는 코스였다. 여기까지 와서 유명한 곳 가보는 게 맞는 일이었겠지만 8~9시간 걸려서 힘들게 다녀왔다는 게 조금 억울했다. 누나가 나한테 말했다면 난 안 간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누나가 나한테 말하지 않았으니 이제 와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누나 입장에서는 맞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누나에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췰레롯지에서 좋은 침낭을 양보받는 것으로 참았다. 싸울 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