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대충 살아도 굴러가고, 대부분의 질문은 묻어둬도 하루는 흘러간다.
그런데 사소한 의문 하나에서 끝까지 이유를 따라가, 의미를 세워 올리는 사람이 있다
책상 위 핸드크림 하나에서 산업과 감성의 층위를 더듬고, 한 점의 그림에서 사람의 마음과 시대의 감각을 끌어올리는 사람.
일상을 발견의 장으로 삼아, 흩어진 생각과 감정을 차분히 구조로 묶어내는 사람.
오늘은 그렇게 질문으로 세계를 짓는 작가, 한이람을 만난다.
제 이야기를 담은 글을 써본 건 브런치에서가 처음인데요. 계기는 미국에서 지낸 시간이었습니다. 한국과 다른 생활 방식과 문화를 관찰하다 보니 궁금하고, 재미있고, 떠오르는 것들이 많아 한 번 기록으로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틈틈이 썼던 것들이 모여 《미국맛이 뭔데요?》라는 시리즈가 되었고요.
일상은 저에게 발견의 장소입니다. 저는 늘 관찰을 해요. 하나에 꽂히면 거기서 생각을 이어가고 확장하는 습관이 있어요.
예를 들어 제 책상 위에 지금 핸드크림이 하나 있어요. 튜브 모양으로 된 거요. 그런데 왜 대부분의 핸드크림은 튜브형태일까? 여기서 시작해요. 포털과 챗gpt로 확인을 해봅니다(정확한 팩트체크나 디테일이 필요할 것 같을 땐 논문을 찾아볼 때도 많습니다). 핸드크림이 튜브 형태인 이유는 휴대성, 위생, 사용 편의성, dp의 효율성을 위해서래요. 그럼 이유가 그것뿐일까? 과거 화장품 로드샵에선 팟 형태의 핸드크림도 나왔었는데 요즘은 왜 잘 안 보일까? 혹은 알루미늄(Aesop 제품 같은)튜브와 라미네이트 튜브의 차이는 뭘까? 알루미늄 튜브는 쓰다보면 터져서 불편하던데, 그럼에도 나오는 이유는 감성 때문인가? 원가 절감? 이런 파생질문으로 이어갑니다. 그러다보면 나중엔 핸드크림이 아니라 다른 걸 파고들게 될 때도 많아요. 지금 핸드크림에 대해 아주 궁금하진 않으니까 여기까지만 할게요.
이런 식으로 저는 사소한 일상의 의문을 제 방식으로 추적하고, 구조화하고, 해석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하나의 감각이나 문화 현상에서 시작한 질문이 흘러가다가 제 해석으로 납득이 되는 순간 쾌감이 와요. 그리고 그걸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요. ‘이런 해석 재미있지 않아?’ 하고요.
자발적 고통이 시작됐다?ㅋㅋㅋㅋ 달리 그럴듯한 말이 떠오르지 않네요. 저는 게으르고 체력도 안 좋고, 뭐든 금방 싫증내는 사람인데요. 이런 제가 질리지 않고 하는 유일한 일이 글쓰기입니다. 주변에서 놀라요. 뭘 또 한다길래 금방 그만둘줄 알았는데 아직도 쓰고 있냐고. 즐겁지만은 않은 일인데도요. 연재를 시작하면서 발행주기가 오면 압박감을 느끼고(아무도 압박한 적 없음), 글상이 안 떠오르면 스트레스도 받고.
생각해 보면 아무도 우리한테 이러라고 강요한 적 없는데 우린 이러고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걸어가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톡톡 두들기며... 즐거울 때도 있지만 저는 고통 받을 때도 많아요. 일단 몸이 힘드니까. 하지만 다들 동기는 달라도 자발적으로 고통에 자기를 몰아넣는 이유가 있겠죠.
한이람 작가의 글은 사소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처음으로 기록을 남기게 만든 계기였고,
그 작은 기록들이 <미국맛이 뭔데요?>가 되었다.
그녀는 일상을 관찰하고, 의문을 따라가 구조로 만든다.
핸드크림 하나에서도 이유를 파고들고, 의미를 다시 세운다.
그 탐구의 즐거움이 그녀를 글 앞으로 이끈다.
사소한 질문을 구조로 세우고, 일상을 탐구로 바꾸는 힘. 그것이 그녀를 글 앞으로 이끈다.
작은 의문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계의 질서를 다시 짓는 사람,
그녀의 글은 일상의 틈을 열어 새로운 시선을 건네준다.
《미국맛이 뭔데요?》입니다. 처음 제 글이라는 걸 써본 시도였고, 그래서 퀄리티가 아쉬운 편들이 많지만 애착이 있습니다. 순수하지 못한 마음이지만, 미국맛은 제 글중 외부 유입, sns공유가 압도적으로 많은 시리즈라는 이유도 있습니다. 한 편으로 들어와서 전체 글을 다 읽고 가는 경우도 많고요. 노출이 많이 되다보니 글 내용과 별 관련 없는 악플도 달리고, 메일로 악담을 한 독자도 있었지만요.
지금 연재 중인 《거실에 호크니를 걸면》인데요.
다 봐주신다면 너무 좋겠지만 하나만 고르자면 저는 "모네에겐 검은색이 없다"편을 가장 좋아합니다. 제 최애 화가인 모네 이야기라 애착이 있어요. 다른 작가님들께서 댓글로 좋은 생각과 취향을 공유해 주셔서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있고요.
모네 글 안의 문장입니다.
"그는 캔버스 위에 수련의 꽃잎이 아니라, 물 위를 스쳐간 빛의 잔상을 그리고 있었던 거였다.
그 흐릿함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검은색이 없어도 나쁘지 않다고."
일종의 고백? 그리고 수용과 자기이해. 흐릿한 모네의 그림에 제 컴플렉스와 감정을 투영한 문장이에요.
쓸 때의 마음은... 대놓고 풀기 뭐한데 모네한테 좀 비벼봐야겠다.
그녀가 처음 자신의 문장을 세운 곳은 <미국맛이 뭔데요?>였다.
서툴고 투박했지만, 그래서 더 괜찮았다.
사람들은 그 글을 오해했고, 사랑했고, 때로는 악담을 보냈다.
그러나 그런 소란조차 그녀에게는 누군가 읽고 있다.라는 증명이었다.
요즘 그녀가 가장 아끼는 글은 <거실에 호크니를 걸면>의 <모네에겐 검은색이 없다>다.
최애 화가의 그림 앞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결핍을 말 대신 색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장은 독자들의 취향과 감정으로 다시 완성되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문장도 결국 그 순간에서 왔다.
"빛의 잔상"을 그렸다는 모네처럼, 그녀 또한 흐릿함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려 했고,
그 흔들림이야말로 가장 솔직한 고백이었다.
그녀는 흐릿한 감정의 조각들을 모아, 스스로의 세계를 다시 빚어내는 사람이다.
그녀는 모호한 순간들 속에서 가장 정확한 문장을 길어 올린다.
저는 제 '문체'가 있나? 싶었는데 다른 작가님들의 피드백을 통해 조금씩 알게 되었어요. 문장을 쓸 때, "정확하게 쓰고 싶다" 외에는 의도하는 바가 없기에 처음엔 듣고도 잘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 이 질문을 계기로, 해주신 표현을 기준으로 제 문체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생각해 봤어요.
저는 대상에서 느끼는 감각에 몰입하고, 그걸 최대한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표현이나 단어를 떠올립니다. 나름의 배경이 있다면 패션지에서 일할 때가 아니었나 싶어요. 어시스턴트라 기사까진 못 건드리고, 신제품 리뷰를 쓰는 일을 했어요. 뷰티팀이라 화장품, 향수 등을 써 보고 느껴지는 향, 질감, 색감 등을 언어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몇 줄 안 되는 짧은 글이었지만 감각을 글로 옮긴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제 나름의 문장 훈련을 그때 시작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문체도 거기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고요, 감정의 절제는 다음 질문에서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본능적인 부분 같아요. 글이 질문이나 생각에서 출발할 때는 거기서 끝내기 아쉬우니까 끌어낼 수 있는 감정을 모색해 마무리하는 식이고요, (MSG 느낌으로) 반대로 감정에서 출발할 땐, 제가 감정의 이유를 찾는 사람이라 자연스레 논리로 이어져요. "이 감정은 왜 생긴 거지?" 식으로. 그러다보니 감정으로 시작한 글이라도 밸런스가 그렇게 되나봐요.
제 글은 제가 주인공일 때가 많지 않아요. 글 안에 종종 제 얘기를 녹이긴 하지만 그것도 에피소드를 통해 글의 주제를 더 잘 전할 수 있겠다 싶을 때 수단으로서 존재하고요. 글의 목적 자체가 제 얘기가 아니다보니, 쓰다가 앗.. 너무 내 이야기로 빠졌다. 싶을 땐 분량이나 정도를 조절합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뜻밖의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글 쓰면서 문장에 대한 고민보다 글의 구조에 신경을 훨씬 많이 써요. 이건 전달력을 위해서예요.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문장도 '전달력'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작가의 의도가 뭔지 단번에 이해가 가는 글을 좋아합니다. 취향 차이겠지만 그래서 현학적인 표현이 많은 글보단 쉽게 풀어쓴 글을 선호하고요. 그게 작가의 내공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론 유시민의 글이 그렇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전달력을 위해 퇴고 과정에서 문장의 군더더기를 최대한 쳐냅니다. 한 문장이 너무 길면 끊고요. 탐구심이라기보다 노력이라면 그 정도가 아닐까요.
그런데 스스로 제 문장을 보면, 완벽을 추구하는지 모르겠어요. 외래어나 신조어도 많고 비문도 많아요. 근데 그런 건 너무 정제하면 또 저만의 색이 사라지지 않나 싶거든요. 그래서 글의 무드를 해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선에서 자유롭게 쓰는 편입니다. 전달력을 제외하면 지루하지 않은 문장 정도가 제 추구미인 것 같아요.
그녀는 감정을 흘리지 않고, 구조를 먼저 세우는 사람이다.
대상을 바라보면 감각이 먼저 도착하고, 그 감각이 단어를 끌어온다.
패션지 시절 향과 질감, 빛의 농도를 문장으로 옮기던 경험은 지금의 절제된 문체에 숨은 첫 번째 훈련장이었다.
글이 질문에서 출발하면 끝을 감정으로 닫고, 감정에서 시작하면 이유를 찾아 논리로 수렴한다.
그 균형 감각은 의식적 기교가 아니라, 그녀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정확성'에 가깝다.
자기 이야기를 과하게 들이밀지 않는 것도 태도다.
문장은 언제나 목적이 먼저이고, 작가는 그 목적을 흐리지 않기 위해 뒤로 비킨다.
그녀가 말하는 좋은 문장은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보도록 설계된 문장이다.
그녀는 감각을 논리로 정제하고, 절제 속에서 가장 정확한 문장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군더더기를 비워내고, 그 빈자리에서 가장 선명한 의미를 끌어올린다.
저에게 예술 장르는 글의 영감보다는 매개가 됩니다. 영감이나 아이디어는 일상에서 주로 받고요, 그걸 잘 풀 수 있는 화가나 그림을 통해 이야기로 만드는 거죠.(호크니 시리즈는 그래요) 음악은 제 글 자체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글을 쓸 때 꼭 함께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미술 시리즈 외엔 예술 장르가 글에 별 영향을 주는 것 같지 않아요!
저는 퇴고 들어가기 전에 이미지 하단에 넣는 캡션이나, 소제목(제 글은 소제목을 넣는 글이 많습니다)을 쓰는데요. 본문에 비해 다들 자세히 읽지 않는 부분인데 저만의 재미로 은유나 농담을 넣기도 합니다. 글 쓸 때보다 과몰입할 때도 있어요. 쓸 데 없는 거 좋아하는 성격이 여기서도 나오네요. 디자이너라 그런지 글에 들어가는 이미지 셀렉이나 레이아웃에도 신경을 씁니다.
글이 나보다 먼저 움직인다는 느낌은 전혀 받아본 적이 없어요. 마봉 드 포레 작가님의 인터뷰에서 읽고 그건 마봉작가님께서 천재라서 그러신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초안 완성하기까지는 브레인스토밍에서 나온 글뭉치, 그때그때 기록해둔 메모들을 얼레벌레 덕지덕지 뿌려놓고요. 다시 들여다보면서 교집합을 찾아서 주제를 정하고, '스스로' 그 뭉치들을 부분부분 움직입니다.ㅠㅠ 정말 스스로 움직여주면 너무 신기하고 좋겠다.
"이게 맞나?"
읽으면 읽을 수록 내가 뭘 쓴 건지, 잘 쓴 건지, 지금 내가 뭔 얘기 하는 건지 모르겠을 때 있지 않나요? 한 퇴고 3회차부터요. 저만 그런 걸까요?
그녀는 영감을 예술에서 끌어오는 사람이 아니다.
대신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을 붙잡아, 그 순간을 가장 잘 비춰주는 예술가를 매개로 삼는다.
그래서 그녀의 미술 글은 화가가 주인공이 아니라, 세상을 사유하는 그녀의 시선이 중심이 된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본문보다 '캡션'과 '소제목'에 욕심을 부린다.
남들은 대충 넘기는 그 자리에 그녀는 은유를 숨기고, 농담을 숨기고,
디자이너의 감각으로 가장 어울리는 자리까지 계산한다.
초안은 늘 어지럽다.
아이디어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문장보다 메모가 먼저 쌓인다.
하지만 그녀는 그 혼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혼란 속에서 교집합을 찾아내는 일이, 그녀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묻는다.
"이게 맞나?"
그 질문을 견디는 힘이, 그녀의 글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녀는 일상의 파편을 예술로 연결하고, 혼란 속에서 구조를 세우며, 끝까지 질문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영감의 순간보다 의심의 순간에 더 오래 머물며, 그 자리에서 글의 뼈대를 세운다.
브런치에서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읽는 데 빠졌어요. 원래는 시간나면 책 읽는 걸 좋아하는데 요샌 책보다 브런치에서 글을 더 많이 읽는 것 같아요. 동물의숲도 많이 해요. 월루라서 사무실 자리에서 닌텐도를 하다가, 브런치에서 글과 댓글도 쓰다가, 잠깐잠깐 일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고 있네요. 그리고 Shawn Mendes 요즘 많이 듣고 있어요.
호기심!이 언제나 제가 글을 쓰게 만드는 첫 번째 감정이에요. 사람이든 뭐든 호기심을 자극하면 영감이 돼요.
쓰다보면 새롭게 써보고 싶어지는 게 생기지 않을까요? 계획하고 움직이는 타입이 아니라서 그때그때의 관심사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 막연하게는 언젠가 소설이라는 장르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어려운 영역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요.
글은 제 생각을 이해 받기 위한 매개가 되고, 연결을 위한 언어도 됩니다.
쓴다는 건 읽히는 걸 전제로 한 행위니까요. 제 글을 읽는 사람에게 뭔가를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요. 재미나 공감도 좋지만, 제 이야기를 통해 읽는 사람이 작게나마 의미나 통찰을 얻는다면 더 좋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생각을 확장할 수 있다면 더더욱 기쁠 것 같아요.
그녀는 요즘 글보다 사람에 더 끌린다.
책 대신 브런치를 읽고, 짬날 때마다 동물의 숲을 하며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다.
글을 움직이게 하는 첫 감정은 언제나 '호기심'이다.
사람의 습관, 어떤 말의 배경, 사소한 문화의 맥락.. 그 작은 의문들이 쌓여 글이 된다.
앞으로의 글은 정해두지 않는다. 관심사가 바뀌면 글도 자연히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
언젠가 소설에도 도전해보고 싶지만, 서두르고 싶진 않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생각을 누군가에게 건네는 방식이다.
읽는 사람이 작은 의미 하나라도 가져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호기심을 연료 삼아 생각을 기록하며, 글로 사람과 세계를 이어가는 존재이다.
오늘의 관심이 내일의 문장이 되는 삶을 살며, 그녀는 조용히 다음 이야기를 준비한다.
더블윤 작가님께서 인터뷰 제안을 해주시면서, 이 인터뷰가 자신의 글쓰는 삶을 들여다보게 되는 기회가 될 거라고 해주셨는데요. 정말 그랬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싶어요. 제 글에 대해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의 칭찬을 해주신 것도 찐감동이었습니다.
장르소설을 쓰기 위해선 그만큼 한 분야의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더블윤 작가님이 가지고 계신 배경지식에 대해 평소 감탄해왔습니다. 게다가 에세이나 연재 외의 글을 보면 유머감각도 있으시죠. 저는 아무리 똑똑하고 의미 있는 글이라도 노잼이면 잘 못 읽어서(글 편식 심함), 더블윤 작가님의 강점은 지성이 아니라 오히려 위트와 감수성 같습니다. 그리고 글로 사랑과 희망이라는 가치를 전하고자 하신다는 지난 인터뷰를 보고 더욱 존경심을 가지게 됐어요.
마봉 드 포레 작가님과의 공동집필이 꼭 실현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애독자 예약할게요. 스타워즈에 버금가는 명작이 하나 나오지 않을까요!
담담댄스 작가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담담댄스 작가님이 브런치에서 스펙트럼이 가장 넓은 분이 아닐까 싶어요. 에세이부터 소설, 서평, 인생 조언, 심지어 랩까지. 폭넓은 장르를 소화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작가님의 특별함은 넓이보다 깊이에 있어요. 작가님 글은 삶에 대한 태도를 되짚게 하고, 생각의 활로를 열어줄 때가 많은데요. 그러면서도 쉽게 특정 대상을 비하하지 않는, 섬세한 윤리감수성이 배어 있습니다. 똑똑하게 비판하는 글은 많이 봤지만, 비판하면서 이것까지 제대로 하시는 분은 잘 못봤습니다. 제가 독보적이라 느끼는 부분이에요. 그 깊이에는 닿을 수 없고, 제가 닮고 싶은 부분은 작가님 글의 전달력이에요. 구조적 완성도와 표현의 정밀함, 거기에 위트. 이 삼박자가 갖춰져서 완벽하게 잘 읽히는 글을 쓰십니다.
추천의 이유는 글에 대한 작가님의 태도를 존경해서인데요. 좋은 글에 대한 고민, 글의 목적. 이런 생각을 늘 하시는 분입니다. 글에 대한 고민을 하시는 다른 작가님들께도 인사이트를 주실 것 같아요. (나누고 싶은 이야기?: 왜케 오바했냐고 하실 것 같은데 뭐라 하시면 따로 사과 드리겠습니다.)
처음 글을 쓸 땐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 생각했지만, 글로 이어진 연대는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연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플랫폼에서의 글쓰기에는 특히나요.
해이 작가님께서 열어주신 이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인연이 글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한이람 작가를 만나보면 먼저 '사유의 출발점'이 얼마나 섬세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글은 큰 사건이나 거창한 경험보다, 일상 속 작은 의문 하나에서 시작된다.
탁자 위 핸드크림이 왜 튜브 형태인지, 왜 어떤 문화는 이런 구조를 가졌는지.
그는 그런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며 자신만의 논리로 세계를 다시 짜넣는다.
글쓰기를 '자발적 고통'이라 말했지만 그 말에서 오히려 알 수 없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금방 흥미를 잃는 성격이라면서도, 유일하게 계속 붙잡는 일이 글이라는 사실이 그를 '작가'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체는 감각에서 출발해 논리로 이어지고,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공감의 깊이를 잃지 않는다.
패션지에서 향과 질감, 색을 언어로 바꾸던 시절이 바탕이 되었고,
지금의 문장은 그때 쌓인 감각적 훈련에 구조적 사고가 얹히며 탄생한 것 같다.
그에게 예술은 영감이라기보다 매개에 가깝다.
일상에서 떠오른 생각을 풀어낼 수 있는 그림이나 화가를 찾고, 그 이미지 위에 자신의 해석을 얹어 하나의 글을 완성한다.
그래서 그의 글은 설명보다 정확한 시선을 남긴다.
요즘 그를 사로잡는 건 사람들의 글이다.
책보다 브런치를 더 많이 읽고, 닌텐도를 하다가 또 글을 쓰고, 작은 관심사가 다음 글의 방향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그 흐름을 억지로 조종하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게 두는 태도에서 그의 글이 가진 편안한 깊이가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글은 이해받기 위한 매개이고, 사람을 연결하는 언어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에게 재미나 공감 그 이상의 ‘작은 통찰’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 욕심이 과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단단하게 느껴졌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는 연대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처음엔 있어도 그만이었던 인연이, 지금은 글을 이어나가게 하는 힘이 되었다고.
그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이 릴레이 인터뷰가 누군가에게도 그런 연대의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이람 작가는 크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확하게 바라보고, 정확하게 적는다.
그 정확함이 그의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가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다.
그의 다음 글이 어디로 향하든, 그 길을 따라가며 또 하나의 해석을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