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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해인 Dec 20. 2021

첫, 눈, 사람

나는 하염없이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일어나 겨울이야.”


 암막 커튼으로 창을 꽁꽁 가려 해가 중천에 떠있는지도 모른 채 곤히 잠들어있던 겨울. 날 깨우던 너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겨울이 온 지가 벌써 언젠데.” 퉁한 말투 내비치며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설렘 가득했던 너의 말투가 왜인지 거슬려 자리에서 일어나 네 옆으로 다가갔다. “지금 밖에 눈 와 예쁘지?” 가려진 커튼 사이로 언뜻언뜻 백설이 내비쳤다. 전날 얕은 눈이 내린다는 기상예보와 달리 지면으로 무수히 많은 눈꽃이 추락하고 있었다. 곧장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는… 눈송이 하나에 설렐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있구나.


 너는 눈 오는 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다. 비와 달리 눈은 소리 없이 내린다며 소복이 쌓인 눈을 밟아 뽀드득 소리를 들어야 눈이 왔음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설원을 거닐었다. 나는 꾸욱 남는 발자국이 맞아떨어지는 게 좋아 바닥을 응시하며 계속 발을 맞췄다. 너와 보폭을 맞추느라 가끔 엉거주춤 이상한 춤을 추기도 했지만, 그 엉성한 순간마저 좋았다. 그러다 둘이 눈이 마주치면 포만감에 숨 쉬지 못한다는 낭만실조의 구절이 생동히 느껴졌다. 서릿발 같은 입김이 웃음 사이로 튀어나왔다. 우리는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하다가 또 한참을 웃었다. 많이 서툴렀지만, 그 어설픔이 사랑의 기원이 아녔을까 생각해본다.


 오늘도 그날처럼 눈이 펑펑 내린다. 나는 눈 오는 소리를 듣고 싶어 곧장 밖으로 나갔다. 네가 갖고 있던 버릇이 여전히 여운처럼 남아있다. 너는 곁에 없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네가 되어 지금까지 그때의 나일 수 있다. 뽀드득뽀드득- 눈을 밟았더니 겨울의 소리가 났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발자국이 고스란하게 남아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발을 맞출 필요도, 요상한 춤을 출 일도 없어졌다. 혼자 밟는 눈은… 너무나도 정직했다.


 얼마 정도 더 걸었을까. 세상의 정적 사이로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의 근원지를 추적했다. 내 발길이 멈춰 선 곳은 동네의 작은 놀이터였다. 무엇이 그토록 즐거운지 그곳엔 꼬마들의 웃음소리가 한시도 끊이지를 않았다. 나는 그곳으로 유유히 들어가 그네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때 허리춤에 다다르는 작은 키의 꼬마 아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거 우리가 만든 거예요 예쁘죠?”

“예쁘네.”


 그 아이가 가리킨 곳엔 울퉁불퉁하고 못난 눈사람 하나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큰 눈덩이 두 개 이어 붙이고 나뭇가지로 이목구비 대충 때운 형태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눈사람이었다. 난 그 형체도 보지 않은 채 먼저 예쁘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네가 싫어하던 나의 버릇 중 하나였다. 고친 줄로만 알았는데 네 앞에서만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미끄럼틀과 시소 사이로 더 큰 눈사람을 하나 만들겠다며 눈덩이를 데굴데굴 굴리는 아이들을 뒤로한 채 나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눈사람이라는 동심과 겨울의 상징 앞에서도 아름다움을 얼버무리는 마음을 가졌으므로 나는 그 사이에 어울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나는 다시 놀이터로 향했다. 꼬마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눈사람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했다. “안녕.” 그때 눈사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안녕.”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제법 친해져 어느새 말동무가 되어있었다.


“우리 같이 따뜻한 세상으로 갈까?”

“야, 넌 추워야지 살 수 있어.”

“춥게만 사는 거면 사는 의미가 없잖아. 난 봄을 보고 싶어. 화창하게 핀 벚꽃이 어떤지 직접 보고 싶어. 녹는다고 해도 아무렴 괜찮아. 단 하루라도 그 온기를 느껴보고 싶어.”

“그렇구나”

“넌 그런 거 있어?”

“어떤…?”

“너에게 있어서 봄 말이야. 네가 녹아내려도 겪고 싶은 순간.”

“없어 그런 거”

“정말 좋아하는 게 하나도 없어? 꼬맹이들은 참 좋은 게 많아 보였어. 날 만드는 그 순간에도 웃음과 대화가 끊이질 않았으니 말이야. 잘 생각해봐. 작은 거라도 괜찮으니까”

“난… 처음을 좋아해. 뭘 하든 낯설어서 설렐 수 있는 그 순간 말이야. 때로는 무섭기도 하지만 그 무서움도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니더라고. 더는 처음일 수 없는 순간이 잦아지니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아. 그래서 돌아올 수 없는 처음을 계속 찾으려고 해 봐도 그게 잘 안되더라.”

“더 없어?”

“지금 쌓인 이 눈도 좋아. 세상이 눈으로 뒤덮이면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얼얼해져. 한 해 동안 겪은 일들이 모조리 이 눈송이에 담겨있거든. 그래서 첫눈이 좋아.”

“이번 첫눈은 누구랑 보냈어?.”

“.. 혼자”

“사랑하는 사람은 있어?”

“있었지.. 예전에.”

“왜 헤어진 거야?”

“내가 너무 모질게 굴었어. 나를 잃을까 무서웠거든. 걔는… 너무 따뜻했어. 온기 가득한 품에 안길수록 내가 점점 녹아내리더라. 맞아, 닿으려 할수록 점점 녹아내렸어. 너랑 봄처럼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 계절이라 핑계를 대버렸지. 너를 만든 꼬마들도 순간의 낭만을 즐기는 거일 지도 몰라. 결국, 밤이 되니 따뜻한 전기요에 배 깔고 누워 몸을 지지고… 낮을 기다리고 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럴수록 너는 점점 사라져 간다는 사실을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난 아무래도 괜찮아.”

“어째서?”

“날 만들어준 아이들이 그게 좋다면야 상관없어. 내 삶과 그들의 온기를 맞바꾸는 거야.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완성되고 사라질 때조차 그들 생각을 하는 걸.”

“아니야 거짓말이야. 그런 걸 괜찮아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어.”

“너도 봄이 오면 나랑 같이 녹아내리겠구나.”


 이윽고 다음 날 아침이 다가왔다. 나는 삐걱이는 그네에 앉아 마찬가지로 눈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이별 이야기 말고 첫 만남을 나누고 싶었다. 무엇보다 봄의 풍경이 어떤지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가 동경했던 봄의 풍경과 온기를 실컷 떠들었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미 숨을 거둔 듯 보였다. 우레탄 바닥 위 그의 혈흔이 진눈깨비로 빙설을 이뤘다. 나는 그네에서 일어나 한참 작아진 그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내년 겨울, 눈이 오는 날에 다시 만나자. 그날이 오면 봄에 데려다줄게. 같이 그곳에서 쉴 틈 없이 녹아버리자." 그를 끌어안을수록 나의 온기가 그를 더 소멸시켰다. 그렇게 눈사람은 자연사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형체를 잃어버린 그의 앙상한 팔을 쥐고는 말했다.


슬픔은 다 과거형이잖아,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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