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찾아오면 나는 또 일기를 써야겠지.
아주 이른 새벽, 안갯속을 유영하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겨울의 햇살은 늘 짙은 어둠을 추월해 옥색 빛의 하늘을 생성한다. 한 폭의 수채화와도 같은 그 풍경은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내포하여 그것을 보고 있는 내 마음도 덩달아 측은해진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계절과 그런 시간. 그 탓에 그간 택해왔던 도피성의 사랑과 거짓으로 끄적인 글들. 이미 휘발되어버린 나의 죄악을 떠올리는 참으로 가혹한 시간이다.
이전까지 새벽을 이루는 것들을 무척 사랑했다. 새벽의 공기와 아찔한 풍경에 취해 그 속에서 질식하는 꿈을 자주 꾸고는 했다. 그것들은 대개 애매함으로 점철되어 있기에 당시 내가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낮과 밤, 더위와 추위, 양극이 맞닿는 시간을 흔히 새벽이라 부르며 나 또한 나의 애매함에 또 하나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탓에 새벽이 찾아오면 지금은 애매해진 관계들이 마구 생각나는데, 그들을 그리워하며 때로는 사무치도록 사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다. 되려 내가 초라해지는 것 같아 새벽이 밉기까지 하다. 그간 내가 스쳐왔던 모든 것들이 전부 내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손에 쥐어본 적 없는 것은 모두 허상인 지라 이제는 그들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노을빛의 하늘 아래 흘러오는 세월을 비껴간 음악들. 지금 이 온도며, 공기며, 끄적이는 글. 그리고 너의 뭉근했던 눈빛마저 손에 쥐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런 것들에 설렐 수 없다.
설렘을 유실한 마음엔 정처가 존재하지 않는다. 등 따습고 배가 불러도 여전히 갈증이 나고,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 역시 그 탓일 테다. 가까워졌다고 해서 선명해진 것이 아닌, 구름과도 같은 그 감정은 여러 계절을 내포하여 내 마음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쓰라린 시간을 잘도 견뎌내고 있다. 저명한 작가들의 위로글을 읽고, 스프링노트에 내 하루를 기록한다거나. 초록병 벌컥벌컥 삼키며 마주 앉아 크하하 너털웃음을 짓는다거나. 매운 닭발 혹은 족발. 입가에 니코틴 물어 쪽 빨아들이거나. 사랑해 혹은 보고 싶어. 둥근 형태를 띠는 대사와 주고받는 키스. 각자가 택한 완벽한 방식으로 끝없이 변동하는 사고의 궤적을 다듬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이 찾아와 가슴이 아려온다면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 차디찬 공기를 찔러 넣을 것이다. 태양이 남긴 잔류와도 같은 그 찌꺼기들을 장작 삼아 새벽을 모조리 태울 것이다. 매캐한 연기 탓에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난간에는 서서히 이슬이 서린 대도 좋다. 아침이 찾아오면 내 눈물도, 이슬도 모두 말라버릴 터이니. 다소 텁텁하지만 다들 그렇게 견뎌내고 있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