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결혼하는 날 아침
작전명 하얀 브래지어
우유를 쏟았다. 매일우유 1리터 팩이 식탁과 마루에 콸콸 쏟아졌다. 이럴 수가. 한여름인데. 아무리 열심히 닦아도 단백질의 미끌미끌한 감촉과 썩는 냄새가 가시지 않을 텐데. 이걸 어떻게 치워야 하나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눈을 떴다. 꿈이었다. 나는 부모님과 동생이 와 있는 신혼집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침 7시 반이었고 메이크업 예약 시간까지는 3시간 남았다.
시험을 2주 앞두고부터 터무니없게 지각하는 꿈을 꿔대던 입시 시절이 떠올랐다. 같은 꿈을 얼마나 많이 꿨는지, 나중에는 지각하는 상황만 돼도 꿈이란 걸 바로 알았다. 심지어 잠을 끊어버리고 시계를 확인하고 쾌적하게 한두 시간 더 잘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이번에도 비슷한 지각몽, 아니 자각몽을 예상했는데 훨씬 더 현실적인 악몽에 놀라 깨버렸다. 이젠 시험에 지각하는 것보다 한여름에 우유를 쏟는 게 더 무섭다.
침실에서 나오니 부모님은 이미 일어나 계셨다. 엄마가 차려주신 아침을 먹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씻었다. 씻고 나와 보니 겨드랑이 제모를 깜빡해 다시 샤워실로 들어갔다. 여성의 겨드랑이 털을 부끄럽게 여기는 통념은 싫지만, 여기에까지 투지를 불태울 에너지가 이미 고갈됐다.
본가에서 자고 온 짝꿍이 도착했다. 예비사위와 예비 장인 장모는 안 어색한 척하는 어색한 인사를 했다. 짝꿍과 함께 전날 밤 택배로 도착한 드레스를 꺼냈다. 위에서 아래로 당겨 입는 드레스라 메이크업을 받기 전에 입어야 했다. 옷을 갈아입기도 귀찮은데 그냥 이대로 입고 집에서 출발할지 고민하며 드레스를 입어본 순간
헐렁한 민소매 씨스루 탑 소매 구멍 사이로 브래지어가 다 보였다.
야 이거 큰일이다. 여태 여러 사람의 결혼 준비 수기를 읽었지만 하얀 레이스 브래지어를 준비하라는 말은 그 어디에서도 들은 적 없었고 나에게 브래지어라곤 스포츠 브래지어나 유니클로 브라탑뿐이었다. 소매 구멍이 넓어 브래지어를 안 하면 가슴이 다 보였다. 당장 속옷을 새로 사야 한다. 여유 있는 줄 알았던 오전이 바빠졌다. 10분 거리에 있는 대형마트에서 본 속옷 매장이 생각났다. 마트 오픈 시간은 10시. 메이크업 샵 예약시간이 10시 반이다. 가족들이 먼저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다녀오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샵 쪽에 양해를 구하고 가족들에게 전달하고 가방을 챙겨 들고 짝꿍과 함께 마트로 달려갔다.
마트로 가는 중인데 어디선가 진한 향이 나고 가방이 축축했다. 핸드폰을 집어넣으려 가방에 손을 넣었다 꺼냈는데 손에 향이 나는 액체가 묻어있었다. 향수였다. 지난겨울 일본 향 박물관에서 만들었던 나만의 향수. 다 만들고 나서 어쩌면 이렇게 내 취향에 꼭 맞는 향이 나왔냐며 동생과 깜짝 놀랐던 그 향수. 가방 안에서 그 향수병의 뚜껑이 열렸던 모양이다. 몇 번 써보지도 못했는데, 향수병은 텅 비어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우유 쏟아지는 꿈이 이런 예지몽이었나. 아냐,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엔 당장 브래지어 찾는 일이 너무 급하다. 이건 기쁨과 행복이 이렇게 흘러넘친다는 복선이고 예지몽일 거야. 정신승리 주문을 외우며 우리는 마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