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 씨가 수술과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 나는 졸업을 했다. 가고자 했던 회사에 인턴으로 입사를 했을 즈음에는 치료 경과가 나쁘지 않아 완치에 대한 희망도 기대를 했던 시기였다. 아빠는 정성으로 엄마를 돌봤고 학생이던 동생도 열심히 거들었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디딘 나만 마치 열외인 것처럼 엄마의 투병 생활에서 빠져있었다. 내가 뭐라도 하려고 하면 한사코 됐다고 하던 그 속내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숙희 씨는 대학에 가기 위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적이 있었다. 똑똑한 학생들만 다녔던 서울여상을 졸업하고 입사한 삼성에서 학벌 차이로 소위 현타가 온 엄마는 가방끈을 늘리기로 결심했다. 원체 머리가 좋은 엄마였으니 인서울은 거뜬히 하고도 SKY도 노려봤을 수도 있었을 텐데. 대학의 문을 두드려보기도 전에 불행이 먼저 문을 두드렸다. 외할아버지께서 쓰러지신 것이었다. 현실 판단이 빠른 숙희 씨는 꿈을 접고 생계를 위해 공무원으로 취직을 했다.
“대학에 가면 뭔가 대단한 게 있을 것만 같았지. 그래서 가려고 했는데......”
어쩌면 숙희 씨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이었을지 모르는 그때를 이따금 이야기하곤 했다. 그토록 바라던 ‘대학’이라는 곳을 별 어려움 없이 다니는 딸내미를 보며 더 생각이 많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엄마는 딸의 인생에서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하는 졸업과 취직 시간에 당신이 아프게 된 것에 대해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아픈 걸 잘 표현하지 않는 성정까지 더해져 치료하는 내내 앓는 소리 한번 들을 새도 없었다. 회사가 너무 바빠서 내가 귀 기울일 정신이 없기도 했고.
재발의 소식을 들은 건 2010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즈음이었다. 처음 암진단 소식 때 보다도 더 곤두박질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가족들도 이럴진대 엄마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이때도 엄마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제일 힘들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대신 일터에서 다 쏟아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회사 대표 및 여러 전문가 선생님들과 함께 사진 스튜디오에서 음식과 그릇을 촬영하는 날이었다. 인턴이 해야 할 일은 촬영을 마친 도자기들을 부지런히 설거지하는 것이어서 겸사겸사 그릇도 씻고 눈물도 씻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이고~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에요? 호호호”
그릇을 씻으러 가서는 눈이 벌게져 나오니 약간의 오해가 있기도 했다. 별안간 애먼 소리를 들은 사장님에게 조금 미안했다. (인턴 나부랭이라 부려 먹히는 게 일상이긴 했지만 말로라도 챙겨주신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딸내미가 밤낮없이 일하는 동안 숙희 씨는 묵묵히 항암을 견뎌냈다. 엄마의 통원을 도운 건 직장의 배려를 받은 아빠와 반백수 동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곧 돌아오는 엄마의 항암 일정에 아무도 날짜를 빼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둘 대신 딸인 내가 나서야 하는 날이 온 것이다. 나도 회사 일정이 빡빡해서 여의치는 않았지만 엄마를 혼자 보낼 순 없었다. 며칠 밤을 새우고 미팅에 참석한 뒤 수고했다며 마사지라도 받고 가라는 대표의 권유를 뒤로하고 병원으로 내달렸다. 헐레벌떡 도착한 병원에서 이미 항암제 투여를 시작한 엄마가 침대에서 나를 반겼다. 됐다고, 안 와도 된다고 손사래 쳤었던 엄마는 나를 보니 그래도 좋았나 보다. 독한 약에 몸이 힘든 와중에도 빙그레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난번 항암 때는 말이야, 젊은 애 하나가 들어오더라고. 딱 봐도 처음 항암을 하는 게 티가 난 게, 책이랑 이어폰이랑 바리바리 챙겨가지고 온 거야. 약 맞으면서 시간을 때울 요량이었던 거 같은데 어림없지. 그런 걸 할 새도 없이 얼마나 몸이 힘든데.”
엄마는 마치 ‘내가 n차 항암 선배니라. 엣헴.’ 하는 듯한 뉘앙스로 말을 이어갔다. 딱딱한 병실의 분위기도 깨고 걱정 가득한 딸내미 마음도 풀어주려고 일부러 하는 이야기 같았다. 하긴 환자보다 더 초췌한 몰골로 침대 옆에 널브러져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날이 내가 딱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행했던 항암 치료였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바쁘다는 핑계로 겨우 한번 엄마의 항암에 함께 했다는 게 아직까지도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물론 내가 업을 제치고 간호에 전념하려 했다면 숙희 씨는 무척 싫어했을 거다. 그렇게 하게 두지도 않았을 테고. 대신 엄마가 뿌듯하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해 일했다. 인턴에서 정직원이 되었고,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을 해 나아갔다. 내가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엄마도 안심하고 기운 내서 병마를 이겨낼 것만 같았다. 숙희 씨는 숙희 씨대로 최선을 다했고, 나도 내 나름의 최선을 다했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