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 씨의 기록장 속에는 기도의 흔적이 켜켜이 남아있다. 남해 시골마을에서 상경한 외할머니가 일찌감치 받아들인 천주교 덕분에 엄마는 모태신앙으로써 교인 생활을 해왔다. 아빠도 같은 신자였기에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이 주말마다 미사에 가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에게 성당이라는 공간은 또래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어서 놀러 가는 마음으로 다녔다는 게 더 맞았던 시절이었다. 안 가면 저 위의 높으신 분께 혼날 거 같기도 했고 말이다.
중고등학교에 가면서 성당에 덜 가기 시작했다. 그즈음 우리 집 거실 테이블 한 구석에는 성경 필사 노트가 있었다. 숙희 씨 특유의 글씨가 빼곡히 담겨있는 페이지를 슬쩍슬쩍 봤다.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시작한 필사였을까? 나중에 넌지시 물어보니 대수롭지 않은 듯 ‘그냥 해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한 숙희 씨였다. 구약과 신약, 그 방대한 분량을 모두 필사하는 노력과 정성을 ‘그냥’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다니. 가볍게 포장한 마음 깊은 곳에서 엄마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을까?
엄마가 나를 위해 했던 두 번의 기도를 기억한다. 수능 전에 드리는 기도였다. ‘백일기도’, ‘수능 기도’로 짤막하게 기록된 엄마의 간절함은 감사하게도 합격이라는 응답으로 돌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나의 신앙은 전보다 더 희미해져가고 있었기에 무언가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의 깊이에 대해 무신경했다. 수능철 뉴스에서 보던 흔한 풍경들이겠거니 했다.
“기도 덕분에 네가 붙은 거다!”
의기양양하게 외치던 외할머니의 말에 ‘내가 노력해서 된 건데, 쳇.’ 하며 삐죽 대기도 했다. (물론 할머니가 무서워서 속으로만 생각했다.) 여하튼, 딱히 간절해본 적 없는 젊은 영혼은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바라고 기원하는 행위를 가벼이 여겼다.
그러다 몇 년 후 엄마가 병에 걸렸다. 절실하게 간구할 것이 생긴 것이다. 엄마가 나을 방도를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의사라고 딱히 아는 건 아니었다. 수술과 약물, 방사선 치료라는 현실의 물리적 방법들은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암환자에게 좋다는 음식을 찾아다 갖다 드릴 수도 없었다. 싫다고, 안 먹겠다고 딱 잘라 이야기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지인이 암에 도움이 될 거라며 보낸 무언가를 먹고 마비 증세가 온 적이 있어 더욱 그랬다.) 뭐라도 하고 싶었는데 직장 다닌다고 바빠서 곁에서 자주 챙겨드리지도 못하던 참이었다.
여느 때처럼 근무하던 오후였다. 나는 잘 모르는 퇴사한 회사 선배가 사무실에 찾아왔다. 호방한 인상의 그 선배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모처럼의 방문에 다른 선배들의 환대를 받으며 대화를 이어가던 중, 얼마 전 발리에 다녀왔다면서 직원들에게 기념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잘 모르는 막내 디자이너들에게도 하나씩 쥐어 준 선물은 실을 꼬아 만든 팔찌였다.
“발리에서는 이 팔찌를 끊어질 때까지 차고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
솔깃했다. 복을 기원하는 흔한 물건들 중 하나였을지 모르지만 어쩐지 좋은 기운을 가져다줄 것만 같았다. 발리의 건강한 기운이 엄마에게도 전해지길 바라면서 짙은 군청색과 붉은 색 그리고 흰색 실이 땋은 머리처럼 꼬여있는 팔찌를 받아 손목에 걸었다. 언제가 되든 엄마를 꼭 낫게 해달라고 읊조렸다.
그날부터 약 3년 간 팔찌는 내 왼 손목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던 그 기간 동안 결혼을 하고 임신을 했다. 진통을 하던 날 팔찌를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하반신에 지진이 난 듯한 통증을 견디면서 엄마를 할머니로 만들어 드릴 수 있음에 감사했다. 팔찌의 마법이 아닌 열심히 치료하고 견뎌 낸 숙희 씨의 노력과 의지 덕분이었겠지만, 실오라기만큼은 내 간절함이 작용한 건 아닐까 작은 기대와 희망을 가져보았다.
팔찌도 엄마도 수명을 다했지만 절실히 바란다는 게 무엇인지는 여전히 마음속에 살아 있다. 오늘처럼 하늘이 맑은 날이면 종종 숙희 씨를 떠올리며 기원한다. 생전에 가고 싶었어도 아파서 못 가본 모든 곳을 훨훨 다니고 있기를, 그리고 가끔은 우리를 보러 와주시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