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 히데코,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를리외르는 ‘예술제본가’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입니다. 를리외르는 오래전에 인쇄된 책을 분해하여 낡은 곳이나 찢어진 부분을 보수하여 다시 꿰매고 책 내용에 맞게 다시 표지를 꾸미는 일을 합니다. 오래전 옛날, 그러니까 책이 귀했던 시절에는 좋은 책을 후대에게 온전하게 물려주기 위한 작업을 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유럽 중세 시절에는 이 일을 수도승이 담당했고, 16세기 이후에는 왕립도서관에 소속된 를리외르들이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책을 만드는 공정도 과거에 비해 훨씬 간단하고, 사는 것도 쉽습니다. 게다가 한 번의 인쇄로 수천 권도 만들 수 있는 덕분에 책이 낡거나 찢어져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새 책을 살 수 있으니까요. 인쇄기술이 보편화된 만큼 를리외르라는 직업은 지금은 사라진 옛날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를리외르는 사라지기는커녕 현재 프랑스에서 예술의 한 분야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림책을 읽어보도록 하죠.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의 주인공 소피는 세상 모든 식물들을 그려놓은 책인 '식물도감'을 가장 좋아합니다. 소피는 이 책을 닳고 닳을 때까지 본 바람에 책 상태는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연결 부분은 다 떨어져 나가 낱장이 되어 흩어지기 직전이고, 소피의 손끝이 자주 닿은 부분은 찢어지기도 했습니다. 소피는 어떻게 해서든 이 책을 새책처럼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책을 오래오래 가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수소문 끝에 를리외르를 찾아가 보라는 말을 듣고 무작정 거리를 돌아다닌 끝에 를리외르가 있는 작은 작업실을 찾아냅니다. 소피의 사정을 들은 를리외르 아저씨는 소피의 식물도감을 다시 만들어 주기로 약속합니다.
책을 다시 만드는 작업은 새 책을 만드는 작업보다 훨씬 정교하고 섬세합니다. 같은 크기로 종이를 잘라서 재단해야 하고, 너덜너덜해진 연결 부분은 실로 한 땀 한 땀 꿰매야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다음에는 새로운 표지로 쓸 가죽을 종이 두께만큼 얇게 만들기 위해서 가죽을 칼로 갈아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 밖에도 60여 가지가 넘는 과정을 거친 후, 마지막 과정인 금박을 이용해 제목을 넣으면 비로소 세상에서 단 한 권밖에 없는 책이 완성됩니다. 여간 보통일이 아닙니다. 새 책을 사라고 하면 그만인데 를리외르 아저씨는 굳이 이 고생을 해서 헌책을 고쳐주었을까요.
를리외르는 어떤 일을 하냐는 소피의 질문에 아저씨를 이렇게 대답합니다.
책에는 귀중한 지식과 이야기와 일상과 역사가 빼곡히 들어 있단다. 이것들을 잊지 않도록 미래로 전해주는 것이 바로 를리외르의 일이란다.
어른이 되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일입니다. 물론 일을 하는 이유는 먹고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 이유만으로 일을 하는 건 아닙니다. 일을 한다는 건 단지 돈을 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사명감이라고 합니다. 이 사명감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없으면 생겨나지 않습니다. 를리외르 아저씨는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자신의 직업에 대한 사명감을 놓지 않았습니다.
만약 세상이 변하고 편리해질수록 오래되고 낡은 것들은 모두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마 를리외르라는 직업은 진즉에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를리외르 아저씨는 세상이 변화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사명감을 지킴으로써 버텨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이 일상과 지식과 역사가 미래로 고스란히 전달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무렇게 대충 하지도, 쉽게 멈추지도 않을 겁니다. 를리외르라는 직업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아저씨가 사명감을 갖고 오랫동안 자신의 직업을 지켜왔듯 사랑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사명감이 없다면 아마 필요할 때만 사랑을 찾고 필요 없다고 생각할 땐 아무렇게나 버릴지도 모릅니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도 않고서 낡고 촌스럽고 못생겼다고, 더 좋은 사랑을 찾고 싶다고 하며 한 때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것들을 쉽게 버리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 요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도 유행을 따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랑만이 오래돼도 낡거나 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고 반짝이는 유일한 것이라고요.
소피의 너덜너덜했던 <식물도감>은 <소피의 나무들>이란 제목으로 재탄생되었습니다. 소피는 이 책에서 배운 대로 심었던 아카시아 나무 새싹을 아저씨에게 선물로 줍니다. 그리고 먼 미래에 아카시아 나무는 마을의 아름드리나무가 되었고, 어른이 된 소피는 식물학자가 되었습니다. 헌 책이 담고 있는 지식과 일상, 역사를 미래에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자신이 사명감이라고 생각했던 아저씨, 지구를 지키고 있는 식물에 대한 일상과 지식과 역사를 미래에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감이라고 생각했던 소피, 둘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사명감이 없었다면 를리외르도 식물학자도 결코 이루지 못했을 꿈이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예술이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