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의 전형적 수법, 가스라이팅의 귀재가 우리 집에도 산다
2016년 1월 어느 날, 강남과 역삼 사이 어느 버스 정류장.
‘하차입니다.’
경기도에서 출발한 빨간 버스가 한 대 서더니 20대 초반의 앳된 여자아이가 머리를 질끈 묶고 백팩을 멘 채 하차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접근하는 두 명의 여성.
“혹시 교보문고 어떻게 가는지 아시나요?”
음? 여기서 이 쪽으로 쭉 직진하시면 돼요. 하고 오른팔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킨다. 근데 한참 걸으셔야 할 텐데,,, 하고 흐리는 뒷 말.
”같이 가 주실 수 있으신가요? “ 핸드폰 지도를 볼 줄 모르나? 하는 말은 적당히 삼키기로 한다.
“집에서 장녀시죠? “
맥락 없이 쏟아진 사실적시. 인상이 참 좋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는데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이지? 도믿걸을 의심하지만 처음 듣는 발화에 일단은 긍정하고 본다.
“남동생 하나 있죠. “
이쯤 되면 도대체 어떻게 알았나 싶다. 진짜로 뭐가 있나? 내 뒷조사를 했나? 나 방금 버스에서 내렸는데? 관할구역이 다른 도시에서 왔는데?
무수히 쏟아지는 생각들과는 다르게 끄덕이는 내 머리통. 무게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남동생이 장남 역할을 못해서 본인이 집안 대들보 역할을 혼자 다 하겠네요. 장군감의 얼굴을 하셨어요.”
얼라리요.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아냐 이 말입니다. 사실 그 후로 쏟아진 말들은 너무 오래전이라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슬슬 도를 믿으십니까의 향이 물씬 나길래 학원에 늦었다는 이유를 대며 정말 급한 척 뛰어서 도망쳤으니 말이다. 집에 와서 신기하다고 얘기를 털어놓으니 엄마가 “확률에 기반한 찔러보기식의 전도가 아니었을까? 보통 요즘 아이가 2명 정도니 장녀 거나 차녀일 테고, 장녀면 여동생이 있거나 남동생이 있을 테지. 남동생이 있든 오빠가 있든 요즘 시대에는 딸들이 더 야무지고 남자들이 속 썩이는 집이 많을 테니 하나씩 찔러보다 보면 다 알고 맞춰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거야. “라고 제법 이성적인 이야기를 해 김이 팍 샜다. 또, 우습게도 당시에는 내가 집에서 꽤나 중요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 칭찬으로 들렸기에 그저 웃으며 넘어갔더랬다.
사이비가 마음이 약한 사람을 꼬드기는 여러 수법들이 우리 할머니의 사랑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면 왜일까.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즈음까지 외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묘사하는 외할머니는 악마 그 자체였다. 동생의 학업 능력과 엄마의 분유 수유 간의 상관관계를 포함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야기들은 의료계 종사자인 할머니의 지위를 통해 더욱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사실 의료계 종사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같은 이야기를 10년쯤 반복해 들은 초등학생에게는 사실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이 존재할리 만무했다. 외할머니와 무척이나 잘 지내는 다른 손녀딸들과는 다르게 혼자서만 낯을 가리고 잘 다가가지 않는 어린 여자애. 그게 바로 나였다.
이처럼 나르시시스트가 정서적 관계에서 권력과 통제를 확립하고 상대방의 판단력, 사고 및 경험에 대한 믿음을 손상시키고 자존감을 하락시키기 위해 행하는 대표적인 정서적 학대로 가스라이팅이 있다. 지속적인 정서적 학대는 개인의 성격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정신질환을 야기하기도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약이다. 차라리 내내 온전히 할머니 편에 섰다면 가족관계나 내 개인의 인성은 둘째치고 내 마음 하나는 정말로 편했을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나는 눈치가 너무 빠른 착한 딸이었다. 나는 가정 내 대소사를 너무 어릴 때부터 알아버린 나머지 발언권으로 통용되는 힘을 얻음과 동시에 병도 함께 얻었다.
나르시시스트인 할머니의 사랑 방식은 멀리서 보면 자기희생으로 가득 차 있다. 조카딸의 취직과 안위를 위해 애쓰고 지역 교회의 부흥을 위해 목사에게 물질과 비물질로 가득한 사랑을 건넨다. 기억이 나는 순간부터 내가 알고 있는 사람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 누가 거기까지 그렇게 신경 써~?‘ 소리가 나올법한 대상에게 애정 공세를 퍼부어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준다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러니 본인이 낳은 아들과 본인이 낳은 것과 다름없이 아낀 손녀딸에게는 오죽했을까. 그러나 본인이 사랑하기로 결심하지 않은 상대에게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이처럼 그녀는 사랑할 대상을 고르고 전심을 다해 사랑한다. 애정을 받는 사람은 그녀의 자랑거리가 되고, 그녀 안에서 자신이 투자할 만한 사람으로 둔갑하고 그것이 또다시 상대방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된다. 나는 늘 그렇게 애정을 받는 위치에 존재했다.
어찌 됐든 늘 애정을 받는 위치니까, 차별당하는 사람 보다야 좋지 않겠냐고? 천만에.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일반인은 알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사랑이 보편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이었다면 애초에 차별적이지도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랑이 가능했다면 그래도 행복하게 사랑받을 수 있었을 테다. 사랑을 충분히 준 후에는 가면을 벗기 시작한다. 우선 상대방에게 사소한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사람이라면 응당 지니고 있을 보답하는 마음을 이용해 점차 더 큰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그녀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음을 직감하는데 당사자를 제외한 타인은 아무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희생적인 사람이니까. 당하는 사람은 홀로 부담스러움과 부당함을 느끼며 미쳐간다. 요구 사항을 적당히 좋은 말로 거절하기 시작하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럴 수 있어?” 한마디로 일축된다. 나르시시스트와의 적당한 관계란 없다. 손절 혹은 감내 만이 답이다. 손절한다면?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설 뿐이다. 이것이 대체 사이비 종교와 다른 점이 어디에 있느냐 이 말이다.
이쯤 되면 그때 교보문고 가는 길을 물었던 사람들에게 되려 묻고 싶다. 제가 정말로 장군감이자 대들보인 것이 저의 잘못인가요? 당신들 같은 사람이 우리 집에도 싱싱하게 살아 숨 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