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녜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화려했던 신동 시절을 그리워 하듯.
“결선 뿐 아니라 1, 2라운드도 흥미진진했어요. 1라운드는 무반주 바이올린 곡으로 20분 내외를 연주하는데, 저는 파가니니의 24개 카프리치오들 중에 1번, 3번, 13번, 24번을, 미우는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 2번을 골랐죠. 와우, 미우의 바흐 연주는 정말 판타스틱. 특히 그 샤콘느!”
“미우의 샤콘느는. 나도 바로 앞에서 연주하는 걸 들어봐서 얼마나 대단한지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아녜스는 어땠나요? 그 연주를 듣고 나서?”
“그쵸? 그쵸? 지금도 미우의 바흐 연주 자주 들어요. 제 MP플레이어에도 잔뜩 들어 있거든요. 지네트가 지금도 바흐 샤콘느 연주 회피하는 거 아세요?”
“그러네요. 지네트가 그거 연주하는 거 못 들어봤어요.”
“하지만 그때는 저도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던 시절이죠. 미우 연주에 매혹되었지만 나도 못지 않다고 여겼죠. 위풍당당하게 무대에 나서서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들을 그 당시 기자들 표현대로 마치 춤추듯 연주했어요. 아니 정말로 춤 추고 싶었어요. 연주 마치자마자 연습실 스케줄 확인했어요. 1라운드 통과 확신했기 때문에 2라운드 준비에 들어갔죠. 피아노 반주가 들어가는 소나타 한 곡을 포함한 30분 내외의 프로그램. 미우는 베토벤 소나타 9번을 신청하더군요. 저는 프랑크의 A장조 소나타를 신청했죠.”
“음, 그건 뜻밖인데요?”
“왜요? 기교로 압도하는 곡이 아니라서요?”
아녜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 그런 뜻은 아니고.”
“아니긴요? 다들 그렇게 보네요? 아녜스는 테크닉은 뛰어난데 음악성은 별로다. 권박사님도 그렇게 보셨나요?”
“아뇨 그렇게는...”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1984년 1월의 그 참혹한 공연을 직접 목격했는데, 아녜스의 음악성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보는 앞에서 깎아내릴 수도 없었다.
사실 난 그 동안 아녜스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아이돌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기교적으로 돋보이지 않는 서정적인 프랑크 A장조 소나타를 연주해서 브뤼셀 콩쿠르 2라운드를 통과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아녜스를 과소평가 했다.
하지만 아녜스는 금새 다시 웃음을 되찾으며 말을 계속했다. 워낙 성격이 그런 모양이다.
“2라운드는 대단했어요. 미우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는, 파리 대회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어요.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그 꼬마 피아니스트 때문이었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았어요. 맙소사! 저 꼬마 피아니스트가 국제대회 입상자들이라는 공식 반주자들보다 훨씬 빛나는 연주를 한다는 것을. 물론 저를 반주해 주신 드 부아 선생님도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지만, 그 분은 뭐랄까, 딱 정해진 연주, 아,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있잖아요? 연주자들 사이에서 이건 이렇게 연주해야 한다 하고 어느 정도 합의가 된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까요?”
“정우는 그딴 거 무시하죠.”
“그러게요. 디누는 달랐죠. 나이도 어렸는데, 아니 어쩌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대담한 연주를 했죠. 어떻게 들으면 마구잡이 같기도 했고, 어떻게 들으면 명색이 바이올린 소나타지만 피아노가 혼자서 다 해결할 테니 바이올린은 방해하지 말라고 으름짱 놓는 것 같기도 했어요. 하지만 미우는 그런 디누의 강렬한 피아노 연주에 묻히지도 부딪치지도 않았어요. 아주 여유 있게 디누의 그 격렬한 연주를 반주 삼아 연주했죠.”
“합의된 틀을 넘어간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클래식은 수백 년 간 조금씩 조금씩 누적되어 온 음악이에요. 그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연주자들이 이 부분은 이렇게 한다, 저렇게 한다 다양한 해석을 했고, 그 과정에 어느 정도 합의된 토대가 만들어지고, 그런 식이죠. 그래서 클래식에서는 틀을 벗어나고 벽을 넘는 연주는 정말 어려워요. 하지만 저는 그날 그 벽을 넘어 갈 수 있는 피아니스트를 봤어요. 그때 마음 먹었죠. 난 꼭 저 아이랑 같이 연주할 거야. 그럼 먼저 저 아이랑 친해져야지. 이렇게 말이죠.”
“그래서 정우와 그때 친해지셨나요?”
“그럼요. 저는 누군가와 친해지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친해져요. 한 번도 누군가와 친해지는 일에 실패한 적 없어요.”
“그랬겠죠. 아녜스는 예쁘니까.”
“꼭 그래서 만은 아니고요.”
아녜스가 조금 민망한 그러나 결코 싫지는 않은 표정으로 내 말을 부정했다.
아니긴 뭐가 아닌가? 아녜스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신의 매력을 의식적으로 활용 했음은 본인도 알고 나도 알고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애니웨이.”
아녜스가 말을 얼버무리고 돌릴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영어 단어를 던졌다.
“저와 미우는 모두 2라운드를 통과하고 5명이 겨루는 결선에 진출했고, 저는 이자이의 카덴짜를 포함한 파가니니 협주곡 1번을 나 스스로 만족할 만큼 연주했어요. 청중 반응도 너무 좋았고요. 그런데 내가 1번, 미우가 5번을 뽑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세 명의 다른 결선 진출자들 연주가 있었어요.”
“그걸 다 들었나요?”
“천만에요. 나는 미우 외에는 관심 없었어요. 미우 차례가 올 때 까지 무려 두 시간 반이나 시간이 비었죠. 그래서 어떤 일본 청년이 베토벤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을 때, 대기실에서 나와 카페로 갔어요.”
“거기서 정우를 만났군요.”
“점쟁이신가요?”
“정우가 그렇게 말했거든요. 브뤼셀. 카페.”
“맞아요. 내가 자리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디누도 카페에 왔어요. 디누도 내 연주만 듣고 다른 연주는 들을 생각이 없었던 거죠. 은근히 기분이 좋았어요. 디누는 카페 들어오자마자 내가 있는 것을 보고 억지로 카페 반대쪽에 가서 앉더군요. 그걸 어떻게 두고 봐요?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앉아있는 디누 앞에까지 갔어요.
무관심한 척 악보를 보고 있는 디누한테 ‘하이. 디누.’ 하고 인사 했죠. 그러자 디누도 어쩔 수 없이 ‘아녜스?’ 하면서 아는 척을 했어요. 제가 한국말이 서툴렀기 때문에 영어로 계속 이야기 했는데, 디누도 영어를 불편해 하지는 않았어요..
‘여기 앉아도 돼?’ 이렇게 물어 보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디누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디누가 더 이상 수줍어하지 않더군요.”
“나는 정우가 수줍어했다는 게 오히려 놀라운 걸요? 그 녀석이 원래 낯가림 같은 거 안 하는 성격인데.”
“어머, 그런가요? 어쩐지.”
아녜스가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며 웃었다.
“일단 인사를 하고 나니까 디누는 완전 물 흐르듯 이야기를 시작했거든요. 어찌나 말을 재미있게 잘 하던지, 두 시간이 고개 몇 번 끄덕끄덕 하고 깔깔거리며 몇 번 웃고 나니까 훌쩍 다 지나가 버린 거에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나눴나요?”
“우리한테만 재미있는 이야기. 다른 사람은 저게 뭐 그렇게 재미있다고 웃고 그러나 할 그런 이야기.”
“음악 이야기군요.”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뻔하거든요. 정우는 하루 종일 음악만 생각하고, 음악만 연습하고, 입만 열면 음악 이야기를 하니까요.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음악, 짜증을 낼 때도 음악,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음악, 농담도 음악. 화가 났다면 형편없는 연주를 들어서 싱글벙글하고 있다면 아주 좋은 연주를 들었거나 새로운 착상이 떠올라서 곡을 하나 만들어서. 그 때 마다 정우는 마침 근처에 있는 사람한테 음악 이야기를 했죠. 학교에서 제일 예쁜 여자 애랑 만나기로 약속 해 놓고는 막상 그 여자애가 왔는지도 모르고 피아노만 치고 있었죠.”
“맞아요. 디누는 정말 쉬지 않고 말했어요. 난 계속 듣기만 했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요. 이젠 저를 좀 아시겠지만, 제가 얌전하게 듣기만 하는 타입이 아닌데도 그랬다니까요. 그렇게 자기 혼자 신나서 이야기하다 시계를 턱 보더니 ‘어, 누나 연주할 시간 다 되었다.’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더군요. 나도 미우 연주는 꼭 듣고 싶었기 때문에 같이 일어섰죠.”
“그때 미우 연주는 어땠나요?”
하긴 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1981년 브뤼셀 콩쿠르 결선에서 미우가 얼마나 훌륭한 연주를 했는지 정우로부터 입에 침이 마르도록 들었으니까.
그때 정우는 허겁지겁 아녜스와 함께 객석으로 돌아가서 간신히 늦지 않게 누나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드레스를 입은 누나의 우아한 모습은 공주 같아 보였지만, 미우의 연주는 단지 우아한 공주의 그것이 아니었다. 미우의 진정한 강점은 우아함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져 있는 탄탄한 구조와 밸런스였으니까.
정우는 누나의 연주를 들으면서 완벽한 구성력에 놀랐다고 했다. 어떤 부분이 조금 강하게 들렸으면 할 때면 어김없이 강한 소리가 나왔고 약했으면 할 때는 약한 소리가 나왔다. 게다가 미우의 연주는 음색까지도 정교하게 구성되어 배치되었다. 날카로운 소리 부드러운 소리, 강인한 소리 부드러운 소리, 노래하는 소리 외치는 소리 등등 다양한 음색이 조금의 어색함 없이 얄미울 정도로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구성력은 객체인 악기가 아니라 자신의 몸인 목을 사용해 노래한다고 해도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연주하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어떤 소리를 내든 미우는 우아하고 편안한 자세로 연주했으며 연주 소리는 물론 연주하는 모습 역시 한 순간도 어색한 모습을 연출 하지 않았다.
마침내 미우의 연주가 끝나자 브뤼셀을 뒤흔들 것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고 미우는 공주처럼 우아하게 인사를 한 뒤 무대 뒤로 퇴장했다. 정우는 대기실로 찾아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 다시 객석에 앉았다. 그리고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아녜스의 낙담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녜스도 이미 누가 승자인지 스스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저는 미우와 견줄 수 없다는 걸 알았죠.” 아녜스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디누를 만났죠. 그때부터 우리는 계속 같이 다녔어요.”
“계속이라면 언제까지를 말씀하시는 거죠?”
“결선이 끝나고 이틀 뒤에 열린 입상자들 기념 연주회, 그날 저녁의 파티, 귀국할 때 까지 쭈욱. 아, 입상자 기념연주회가 저와 디누의 첫 번째 듀엣 연주였던 거 아세요?”
“아뇨.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입상자 기념 연주회라면 정우는 당연히 누나랑 연주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미우가 워낙 바흐 연주로 유명했기 때문에 주최측에서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 2번을 연주해 달라고 요청했거든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디누가 할 일이 없어졌죠. 그래서 제가 이 때다 싶어 디누한테 피아노 쳐 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고, 디누는 아주 기쁘게 오케이 했죠. 그래서 우리는 기념 연주회에서 프랑크 소나타를 같이 연주 했어요. “
“어땠어요?”
“와우! 디누는 바이올린과 같이 연주하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심지어 피아노가 함께 연주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냥 내가 생각하는 대로 연주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피아노와 소리가 척척 맞아가고 있었죠. 너무 편안했고, 너무 아름다웠어요. “
“한번 연주하고 헤어지기 아쉬웠겠네요.”
“그럼요. 그래서 여러 곡들을 같이 연습해 봤어요. 비탈리의 샤콘느, 코렐리의 라 폴리아,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 파가니니의 소나타 몇 곡, 비외탕 소나타, 사라사테의 카르멘 환상곡, 찌고이네르봐이젠, 비예냐프스키, 크라이슬러의 소품 몇 곡. 와, 모든 곡들이 착착 들어 맞았어요.”
“정우도 좋아하던가요?”
“그럼요. ‘지금 이 곡들 연주했을 때 감 잊지 마. 그럴 수 있지?’ 이렇게 말하더군요. 반문했죠. ‘그런데 너는? 나는 이 곡들 여러 번 연주해 봤지만, 넌 오늘 나하고 첨 해본 거 아니야?’ 그러자 디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이미 충분히 기억하고 있어. 몇 년이 지나더라도 아녜스가 지금처럼 연주할 수 있다면 난 언제든지 지금 연주했던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어. 난 한 번 연주했던 곡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아. 손가락 감각 하나하나, 페달 감각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할 수 있어.’ 와. 정말 건방지지 않아요?”
“그러게요. 간접적으로 전해 들어도 재수없게 들리는 걸요?”
“그때는 그게 참 멋져 보였어요. 그 대담함. 자신감. 여섯 살 때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저 앞에서 더구나 내가 두 살이나 누나인데도 저렇게 자신감 있게 자기를 뽐낸 사람은 디누가 처음이었 거든요. 그런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내가 정우도 좋아했느냐고 물어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 곡들은 피아니스트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그야말로 쿵쿵 탕탕 박자만 맞춰주어도 되는 철저히 바이올린 중심의 곡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의식 강한 정우가 저런 쇼 바이올린 곡들 반주나 맞춰주는 연주를 과연 좋아했을까?
아녜스를 좋아해서였을까? 정우는 아녜스를 만나고, 함께 연주해 본 그 순간 빠져 들었고, 누나와 결별할 준비를 한 것일까? 그래서 아녜스를 돋보이게 하고 자신은 그 뒤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배신감을 느꼈다. 정우는 늘 음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괴팍한 가치관을 뽐내고 다녔고, 사람들은 그걸 특권처럼 인정해 주었다. 그런데 정우가 ‘미우&디누’ 2중주를 중단하고 ‘아녜스&디누’의 2중주를 시작한 까닭이 결국은 에로스 때문이라고?
“나는 그 기쁨을 어떻게든 드러내고 싶었어요.”
내가 의혹을 가지거나 말거나 일단 말문이 터진 아녜스가 봇물 터지듯이 말을 쏟아냈다.
“그 기쁨을 드러낼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요? 한국인들은 그럴 때 어떻게 그 마음을 표현하나요? 하지만 나는 한국말도 잘 못하고. 그래서 디누에게 사뿐사뿐 다가가서 뺨에 살짝 키스하고 ‘내일 연주회 너무 기대되.’라고 말했어요. 무척 당황하더군요. 저도 당황했어요. 아무 생각 없이 한 거였는데, 얼굴이 화끈거려 마치 와인이라도 한잔 마신 것 같이 달아 올랐거든요.”
“다음날 정우가 어색해 하지 않던가요?”
“네버. 디누는 다음날 오히려 더 친절했어요. 공연장까지 악기도 들어주었고, 마치 몇 년 전부터 같이 연주하며 다녔던 파트너처럼 편안하게 대해 주었어요. 악보도 꼼꼼하게 다 정리해 주고, 저는 그냥 드레스만 신경 쓰고 예쁘게 무대에 올라가기만 하면 되었어요. 그래서 미우가 살짝 샘이 나기 시작했어요. 나는 이렇게 한 번 연주하면 디누와 헤어지지만, 미우는 날마다 이런 대접을 받으며 연주할 수 있잖아요?”
“웬걸요?” 나는 손을 내저으며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아녜스의 말을 반박했다. “정우는 누나한테 그렇게 살뜰하지 않았어요. 같이 연주할 때는 진지했지만, 평소에는 거의 무관심 했죠. 그래서 저는 두 사람의 2중주를 들으면서 치열하고 치밀하다는 느낌은 받아도 따뜻하고 다정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어요. 미우는 정작 동생인 정우보다는 저하고 더 가깝게 지냈어요.”
“어머, 정말요?”
순간 아녜스의 얼굴이 아주 빠르게 붉은 기운을 띠기 시작했다. 눈가에서 시작된 붉은 물결이 목과 귀까지 물들였다.
“음. 그런데 연주회는 잘 되었나요? 프랑크 소나타?”
“너무 훌륭했죠. 디누는 아티큘레이션 하나하나 세밀하게 내 소리에 착착 맞춰가며 연주했죠. 그러면서도 그 피아노 울림이 얼마나 예쁘던지. 그리고 그 반복되는 주제는 얼마나 견고하던지. 나는 연주한다기 보다 디누의 연주를 즐겼죠. 물론 가장 큰 박수는 제일 마지막에 나와서 바흐의 샤콘느를 두 번이나 앙콜로 연주해야 했던 미우가 받았지만요. 그리고 그날 저녁 여왕님이 개최한 기념 파티에서 디누와 왈츠와 폴카를 추었어요.”
“춤이요? 정우가?”
“왈츠나 폴카는 간단하잖아요? 쿵작작, 아니면 쿵작쿵작. 또 흥겹고. 그래서 그냥 둘이 붙들고서 빙글빙글 돌았죠 뭐.”
“하하. 드레스에 턱시도 차림을 하고 막춤을 추셨네요?”
생각만으로도 그 자리의 흥겨움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풋사랑에 들뜬 십대 소년 소녀가 스텝도 모르는 춤을 수많은 왕실 귀빈이 보는 앞에서 추고 돌아다녔지만, 서로에게 몰두하고 있느라 부끄러움도 모르고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광경이라.
“정말 재미있었어요. 신나고 행복했죠. 파티에 100명도 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린 서로만 바라보았고, 다른 사람들도, 무엇도 보지 않았어요. 그러다 미우 생각이 났어요. 동생을 가로챈 것 같아서 미안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슬쩍 슬쩍 미우 쪽을 보았죠. 미우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틀어 올린 머리에 티아라를 하고 있었는데, 마치 아시아 어느 나라에서 온 공주님 같았어요. 그런데 미우는 어느 나라 왕비처럼 보이는 여자 분, 또 노신사 한 분과 이야기 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나는 미우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 볼 수 있었어요. 왕족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는 분들이죠. 왕비 같아 보인 분은 이다 헨델, 노신사는 아르뛰르 그뤼미오였으니까요.”
“와. 대단하네요.”
나는 전설적인 음악가들의 이름이 들리자 탄성을 내질렀다. 레코드로나 접할 수 있었던 그런 전설적인 대가들이 회상에 등장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그들이 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 실감났다.
“그 분들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어요. 디누가 없었으면 저도 쪼르르 그 앞으로 달려갔을 거에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그뤼미오는 커녕 파가니니가 환생을 해서 나타나도 디누와 저를 떼어 놓지 못했을 거에요.”
“과연 그럴까요? 그건 아녜스 생각이죠. 만약 그 자리에 브렌델, 굴다, 에셴바흐 같은 피아니스트가 나타났으면 정우는 당장 아녜스 손을 내던지고 달려갔을걸요?”
나는 이 말을 하지 않고 억지로 삼켰다. 마흔에도 여전히 소녀 같은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에게 굳이 진실을 밝혀 실망을 안겨줄 정도로 앞뒤 막힌 사람이 아니니까. 아름다운 추억은 그냥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으렴.
“우리는 영화처럼 발코니로 나갔어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스했죠.”
“아, 그때 벌써?”
“제가 나이보다 어려 보여서 그랬지, 이미 열 다섯이라고요. 미국에서 그 정도는 다 하는 나이죠. 그런데 그 시간이 오래가진 않았어요. 하필 그때 미우가 나타났거든요. 우린 너무 당황해서 황급히 입술을 떼고 그냥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빈둥빈둥 돌리면서 미소 짓는 얼굴을 만들어야 했죠.
미우가 디누에게 뭐라고 뭐라고 말 했어요. 그리고 디누도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 했는데, 워낙 말이 빠른데다가, 제 한국어가 서툴러서 잘 알아듣지 못했어요. 다만 느낌으로 봐서는 뭔가 언쟁이 좀 붙은 게 아닌가 싶었어요. 우리가 이렇게 애정표현을 한 것이 뭔가 큰 문제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조금 있다 미우가 너무 기뻐하며 디누를 부둥켜안더군요. 그리고는 달려가다시피 홀 가운데로 사라졌어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너 저 계집 아이랑 헤어져.’ ‘알았어. 누나 뜻에 따를 게’ 이런 이야기가 오간 것이나 아닐까 불안했어요. 그런데 다시 내 앞으로 돌아온 디누의 말이 뜻밖의 것이었어요.”
“뭐라고 했죠?”
“에이. 누나한테 돈 뜯겼다.”
“돈을 뜯겨요?”
“그러게요. 그래서 깜짝 놀라며 ‘돈을 뜯겨? 얼마나?’ 이렇게 물어 보았고, 디누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2천 달러.’라고 대답했어요. 그때 2천 달러라면 당시 미국 공무원 석달치 월급에 맞먹는 큰 돈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너무 놀란 기색으로 있으니까 디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죠.”
“바이올린 샀죠. 도메니코 몬타냐나를.”
“어머, 아셨어요?”
“네. 나중에 미우한테 그 악기를 수중에 넣기까지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맞아요. 디누가 말했어요. 미우가 이탈리아 올드 악기 하나를 입찰가 수준으로 팔겠다는 악기상을 만났는데, 그래도 돈이 부족하다고 했다며. 악기 이야기가 나오니까 저도 호기심이 막 생기고 은근 신도 나서 막 말했어요. 대체 어떤 악기길래 동생 개런티까지 털어갈까? 이탈리아 올드라면 크레모나 계열 아니면 베네치아 계열일 거고. 미우가 그 동안 고프릴러 복제품 썼으니까, 아무래도 크레모나 보다는 베네치아 쪽일 가능성이 크고, 그럼 고프릴러 아니면 도메니코 몬타냐나일거야. 와, 나도 보고싶어. 이러면서.”
“아니 델 제수를 쓰고 있으면서 다른 악기까지 탐을 냈어요?”
“어머 디누가 딱 그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그건 바이올리니스트 생리를 몰라서 한 말이죠. 피아니스트야 자기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몇몇 독특한 분들을 빼면 몸만 다니면서 투어를 하죠. 좋은 악기 구하는 일은 연주자가 아니라 공연장 몫. 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는 항상 악기와 함께 다녀요. 악기에 대한 집착이 피아니스트 몇 십 배죠. 어디서 좋은 악기가 나왔다 그러면 지금 쓰고 있는 악기가 아무리 좋은 게 있어도 또 달려든답니다. 특히 올드 바이올린은 모양만 똑 같지 전혀 다른 악기라고 해도 될 만큼 서로서로 음색이 다르거든요.”
“그렇게나 차이가 나요?”
“델 제수를 가지고 있었지만, 우아하고 서정적인 곡을 연주하면 스트라디바리나 과다니니가 탐이 났고, 우울하고 깊이 있는 곡을 연주하면 고프릴러나 도메니코 몬타냐나 생각이 둥실둥실 떠오르죠. 지네트 보세요. 내가 아는 것만도 스트라디 바리, 과다니니, 과르네리, 그리고 또 하나가 뭐더라? 하여간 이탈리아 올드가 네 개나 있어요. 지네트의 레파토리가 넓고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연주를 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악기가 많아서 그때 그때 곡에 맞는 악기를 들고 올라오는 거죠. 어머, 내가 이런 말을 왜 했지? 이건 취소해 주세요.”
아녜스가 두 손을 모아 입을 급히 가리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거야 뭐, 상관 없어요. 지네트 본인도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어쨌든 그 다음 이야기는 저도 미우 누나한테 들어서 알고 있어요. 결국 미우가 도메니코 몬타냐나를 구했죠. 정말 좋은 악기죠. 그런데 이거 아세요? 미우는 도메니코 몬타냐나를 구한 다음에도 계속 아녜스의 델 제수를 탐냈답니다.”
“호호. 그럼 피장파장인가요? 저도 늘 그 도메니코가 탐났으니까. 게다가 미우는 헨릭 셰링 선생이 은퇴하시면 쓰시던 델 제수를 물려준다고 했으니까 이미 확보 해 둔 것이나 마찬가지였잖아요?”
“하지만 미우가 셰링 보다 먼저 관둔 걸요? 그래서 저는 도메니코 몬타냐나를 볼 때 마다 레드 바이올린이란 영화가 생각났답니다. 정말 비길 수 없이 훌륭한 악기였지만 주인에게 항상 불행을 가져다 주었던 악기. 미우 누나 그렇게 되고. 다음에는 정우가 비명에 가고.”
“공학 박사 앞에서 그런 초자연적인 말씀이라뇨? 저도 그 영화는 봤어요. 아내의 피를 도료에 섞어서 발라서 붉게 칠해진 바이올린 이야기죠? 그냥 영화잖아요? 정말 그 악기가 불행을 불러온다면, 미우 이전에 그 악기 가졌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다 조사해 봤어야죠. 천수를 누렸을 걸요? 참, 그런데 지금 그 도메니코 몬타냐나는 누구한테 있죠? 미우는 디누한테 넘겼다고 했는데.”
“정우는 그걸 한 동안 지네트에게 맡겨 두었고, 지네트가 공연 때 많이 썼어요. 나중에 로사가 크면 받아 가겠죠.”
“호호호. 마리는요? 나중에 싸움 나겠네요?”
“안 그럴 겁니다. 마리는 피아노니까. 하암.”
순간 나는 한참을 참고 버텼던 하품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숙녀 앞에서 이런 실례가! 황급히 하마같이 벌어지려던 내 입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아, 죄송합니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되어서 눈꺼풀이 그냥 막 주저앉네요.”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되었네요?”
아녜스가 그제서야 내 발치에 놓인 트렁크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짐도 풀기 전에 이렇게 붙잡았어. 미안해서 어쩌죠?”
“미안하긴요 뭘. 그런데 벌써 하실 얘기 다 해버렸으니, 내일은 특별히 할 것도 없네요? 그냥 관광이나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