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에 스스로 한계를 긋는다.
경기도에서 할 일을 모두 끝내고 남는 시간에 서울에 갔던 적이 있다. 가볼 기회가 없던 장소들을 둘러보곤 했는데, 역시 서울답다. 어딜 가든 인구의 밀도가 압착된 캔처럼 내 몸도 덩달아 찌그러뜨리는 바람에 물을 아무리 채워도 빠져나가는 구멍 난 항아리를 안아 들고 걸어 다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서울주민들에게 서울은 살 만한 곳일까? 확실히 수도권답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선택지가 압도적으로 다양하다. 시간이 많이 흘러 기억이 흐릿하지만 한 번은 꼭 참여하고 싶었던 행사가 있었는데 상세 내용을 살펴보니 서울에서만 진행하는 바람에 금세 단념했던 적도 있었다.
지방에서 거주하고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빈곤한 선택지'일 것이다. 지방에서는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들을 서울(또는 수도권)에서 할 수 있다. 양질의 일자리도 풍부하고 문화생활도 다양하게 누릴 수 있으니 청년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미래를 생각했을 때 '미래가 도무지 희망적이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지방보다는 '미래가 무궁무진한' 서울에서 힘겨울지라도 살아가는 게 낫다고 판단할 만하다. 나조차도 여행 목적으로 서울을 돌아다닐 때 대중교통이 잘 구성되어 있으니 몸이 약간 불편해도 다닐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멸 직전인 지방에서는 빈곤한 선택지가 한발 더 빠르게 현실로 닥쳐와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서울은 개인적으로 여행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거주하기에 좋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쩐지 서울이 여유롭고 편안한 도시인 것 같지는 않다. 경제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여행하는 날들 내내 지하철만 타도 사람들이 좁은 간격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기에 출퇴근 시간대라면 이보다 더 좁아져서 숨이 막힐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퀴즈에 98년생인데도 시골에서 최연소 이장으로 살아가는 남성분이 출연한 영상을 본 기억이 났다. 이장님께서는 시골에서 어떤 매력을 느꼈기에 떠나지 않으시는 걸까 궁금해진다. 주민의 99%가 어르신들인 시골은 빈곤한 선택지의 가장 대명사격인 사례다. 거기서는 사실 크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시골(또는 지방)에 대해 우리가 긍정적으로 볼 만한 점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수도권으로의 이주가 지방에는 ‘미래가 없고 이곳에서 얻을 만한 것이 마땅치 않다’라고 처음부터 유리천장을 은연중에 세워뒀기 때문이 아닐까? 단순히 남들이 지방은 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어서 스스로도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매력적인 지방을 찾아보려고 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뿌리가 깊은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겠다는 선택에 대해 반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서울 이주 현상에는 선택에 대한 ‘빈곤화’의 영향도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시험문제를 출제하며 답의 선택지를 여러 개 제시하는 것과 단 두 개를 제시하는 것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다. 처음부터 선택지의 개수를 제한하면 우리는 ‘다른 수많은 선택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선택지 내에서만 답을 찾는다.
선택의 빈곤화는 비단 서울 이주 현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삶의 전반에 대한 것이다. 선택지가 처음부터 빈곤한 것과 스스로 선택지에 한계를 규정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한계를 규정한 탓에 오히려 다른 장점을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한다. 그 선택지들의 수는 누가 규정하는 것인가? 한 번쯤은 생각해봄직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