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네? 그게 된다고요?"
"와 대단하시다~~"
나와 달리 독서모임 회원분들은 오디오북을 아주 잘 활용하고 계셨다. 일하시면서 짬이 나실 때, 그리고 운동하실 때 '윌라'로 책을 읽으신다고! 이어폰 생활을 잘하지 않는 나로서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왜 때문인지 나는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자꾸 빠져나오고, 심지어 잘 꽂혀있어도 연결이 끊기면서 자꾸 핸드폰 작동이 멈춘다. 편견이 생길까 봐 어떤 회사 제품인지 밝히지는 않겠다. 어쨌든지 간에 자꾸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무선 이어폰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런데 독서모임 회원분들 말씀을 듣고 오디오북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집안일을 하면서 소설책을 들어보기로 했다. 소설책을 "읽다"가 아니라 "듣다"니... 다시 한번 격세지감을 느끼는 바다. 이렇게 틈틈이 오디오북을 들으면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욕심을 내어 오디오북을 켰다.
마침 나는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고 있어서 다양한 오디오북 컬렉션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밀리의 서재가 오디오북 제공을 안 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메뉴탭이 생겼다. 눌러보니 유명한 추리소설도 있고 베스트셀러도 있어서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마침 랭킹 1위에는 내가 아는 배우의 이름이 있어서 바로 그 책을 듣기 시작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책은 클레어 키건의 작품으로, 1895년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펄롱'이라는 중년 남성이 당시 수녀원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내용이다. 작가인 클레어 키건은 <맡겨진 소녀> 등을 출간한 유명 작가일 뿐만 아니라,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이 책은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해당 영화는 2024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다.
오디오북을 플레이하자마자 흘러나오던 정우님의 중저음 목소리. 황량한 아일랜드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예전에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여느 수도의 북적거림과는 달리 쓸쓸하고 적막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바람 많고 추웠던 소도시의 거리. 책의 배경과 배우의 목소리는 그 기억을 되살아나게 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줄거리
주인공 펄롱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란다. 그의 어머니는 윌슨 여사의 집에서 가사를 도와주며 살았는데, 덕분에 펄롱 역시 윌슨 여사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보살핌을 받고 성장한다. 훗날 펄롱이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살던 중,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수녀원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당시 수녀원과 교회가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컸기 때문에 모두들 그 비밀을 애써 외면한다. 펄롱 역시 자신의 일과 가족들이 연루될까 봐 그 비밀을 묻어두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깨닫고 행동을 실천한다.
생각보다 짧았던 책의 길이. 페이지가 131쪽 밖에 되지 않았고, 오디오북 역시 2시간 30분이면 끝이 났다. 심지어 영화도 러닝타임이 98분 밖에 되지 않는단다. '이렇게 끝나는 게 맞나? 2편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스포주의) 펄롱이 부조리에 맞서서 싸우는 내용을 기대했는데 본격적인 싸움 전개는 나오지 않는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펄롱이 약자의 편에 서게 되는 계기를 밝히면서 책은 결말로 향한다. 본인이 윌슨 여사에게 받았던 사랑과 관심, 그 "사소한 것들"을 떠올리며 자신도 그 사랑을 베풀어야 함을 깨닫게 되면서다. 더 나아가 펄롱은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소녀들이 학대를 당하는 모습을 더 이상 묵인할 수 없었기에, 정의를 위해 행동했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그는 오랜 고민 끝에 수녀원에 갇힌 소녀를 구출한다. 그리고 이렇게 독백한다.
그러나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펄롱의 결심,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상당히 울림이 컸다. 그래서인지 비록 책의 분량은 짧았지만 마지막 메시지만으로도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나 역시 사소한 것들을 돌아보고, 그 속에 들어있는 가치를 타인과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상생이 필요하다.
인생 첫 오디오북을 완독하고 나니 은근히 뿌듯했다.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하여 독서를 한 것 같아 보람이 느껴졌다. 정우 배우님의 목소리는 너무 좋았고 책 속 분위기, 그리고 이 겨울과 잘 맞아떨어졌다. 생각보다 연기력을 과시하시지는 않아서 담백하게 잘 들었다. 듣기 전엔, 읽어주는 사람의 목소리 변조와 연기가 과하면 어떡하나 괜히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같은 오디오북을 전문 성우님들이 녹음하신 버전이 따로 있네? 살짝 들어봤다. 세상에 딕션이랑 읽는 속도, 호흡, 연기가 깔끔 그 자체다. 남자 역할은 남자 성우님이, 여자 캐릭터는 여자 성우님이 딱딱 맞게 연기하시니 몰입감이 더 생긴다. 죄송하지만 다음번엔 무조건 성우님들 버전으로 듣는 걸로. 다음 책은 무얼 들을지 벌써부터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