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퀄 오디오북 입문기
그때 그 시절. 90년대 중반이었을까?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라디오를 듣다 보면 '제5 공화국' 드라마가 흘러나왔다. 성우들의 또렷한 발음과 대사, 실감 나는 연기. 나이가 어렸을 때여서 내용은 잘 몰랐지만, 아직도 그 흥미진진함과 긴장감은 귓가에 강렬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금 그 경험을 떠올리는 이유는, 라디오 속으로 빠져들었던, 그 드라마와 같은 오디오북을 만났기 때문이다.
제목: 첫여름, 완주
작가: 김금희
출판사: 무제
<첫여름, 완주>라는 김금희 작가의 소설이다. 주인공인 '열매'는 성우인데, 룸메이트 언니 '수미'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떼인 충격으로 목소리를 잃는다. 수미의 잠적으로 우울증 진단까지 받은 열매는 돈을 받기 위해 수미의 고향 '완주'로 향한다. 이후 열매는 수미 엄마의 매점에서 일을 하며 완주에 머물게 되고, 마을 사람들과 깊은 유대 관계를 쌓으며 여름 한 철을 그곳에서 보낸다.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삶과 상처 속에서 수미는 오히려 사람 냄새에 물들며 더불어 사는 삶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이 책의 발매 시점은 상당히 독특하다. 25년 4월 28일 오디오북이 오픈되고 그로부터 열흘 뒤에 활자로 된 책이 출간된 것이다. 오디오북이 먼저 출시된 데에는 독특한 이유가 있었다.
1. 출판사 '무제'
이 출판사는 박정민 배우가 운영하는 곳이다. 책을 사랑해서 출판사를 차렸다는 그.
'무제'는 제목이 없고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소외된 것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한다는 목적으로 출발했습니다.
(박정민 인터뷰 중에서)
그는 "비시각 장애인도 읽을 수 있는 책을 목표로, 잉크가 아닌 소리로 만나는 소설을 통해 의미 있는 간접경험을 전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아버지가 시력을 잃으셨다는 이야기도 후문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듣는 소설'을 제작하기로 했고, 그 소설 1호가 바로 <첫여름, 완주>인 것이다. 박정민 배우가 직접 김금희 작가에게 오디오북을 위한 소설 제작을 의뢰했다고 한다. 김금희 작가는 그 제안을 수락하고, 희곡처럼 각 인물의 대사가 담긴 형식으로 이 책을 썼다. 상당히 독특한 형식이 아닐 수 없다.
2. 성우? 그리고 연기력
우연히 '윌라'라는 플랫폼의 이용권을 얻게 되었고, 마침 궁금했던 이 책의 오디오북 버전을 곧바로 들어보았다. 어찌나 발음과 발성이 좋고, 연기가 실감 나던지! 개성 넘치는 목소리와 배경음악이 상상을 자극하며 귓가에 울려 퍼졌다. 여름의 푸른 산과 우뚝 선 '완주 나무'가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이런 류의 오디오북을 처음 접하는 것이어서 '역시 윌라 성우진이 이 분야에서 최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선입견이었다.
이 오디오북은 전문 성우가 아닌 실제 배우들이 녹음을 한 것이었다. 특히 마을에서 프라이버시를 우선시하며 은둔 생활을 하는 '배우 정애라' 역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실제로 그런 음성을 가진 한 여배우가 생각이 났었더랬다. 그런데 진짜로 박준면 배우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 고(故) 신해철 님의 라디오 방송이 등장하는데, AI로 구현한 가수 신해철의 목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박정민 배우가 연기한 것이라니... 너무 똑같아서 말문이 막혔다. 마지막으로 찰진 사투리의 할아버지 역할! 개그맨 최양략 님이었다니, 역시는 역시다.
정말 두 귀가 호강했던 오디오북이었다. 스토리도 너무나 흥미진진해서 만 이틀 만에 한 권을 뚝딱 끝내버렸을 정도다.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가 없어서 언제 멈춰야 할지 고민했던 그 이틀. 오디오북이 다 끝나고 나서도 그 여운이 짙게 남아있다.
3. 소설이 주는 메시지
'완주'라는 공간. 그곳은 단순한 지역적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을 엮고 감싸주는 위로가 된다. 그 단어가 지닌 이중적 의미에 주목해야 할 때다.
신해철: 힘내시기 바라겠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몫을 또 완주해야 하니까요.
즉, 목표한 지점까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뜻이 담겨있었다. 이 소설은 결국 '삶을 다시 걸어서 완주해 보자'는 메시지를 전하며 작고 사소한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감정의 회복을 섬세하게 다룬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다시 시작하는 마음'을 선물로 받아갈 것이다.
자신을 가로막는 그 불행과
겨뤄보겠다는 응시는
여름의 빛과 가장 닮아 있었다.
김금희 작가 특유의 따뜻한 시선과 섬세한 문장이 빛나는 책이다. 상실과 방황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이 소설은 조용하지만 애정 어린 용기와 응원을 건네준다. 청량감 넘치는 여름의 시작점에서 치유의 여정을 경험하고 싶은 분들께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