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이 멎는 자리
문을 밀고 들어서면 바람이 먼저 목덜미를 스친다. 주문대 앞에 일렬로 선 사람들 뒤로, 사람의 물결이 테이블 사이를 흘러간다. 나는 습관처럼 한 번에 고개를 두 번 돌린다. 출입문과 계산대, 화장실로 이어지는 길. 그 세 곳의 선을 잇고도 남는, 사람이 닿지 않는 모서리를 찾는다. 오늘도 빈 자리를 찾았다. 벽과 등이 만나는 각도가 눈에 띄어 거기에 앉는다. 흐름은 이곳에서 멎는다.
종이컵 대신 머그컵을 부탁해 본다. 바리스타가 내 이름을 또박또박 부른다. 커피를 받아 올 때 컵 밑에 코스터를 하나 더 받는다. 모서리 자리로 돌아와 컵을 내려놓으면 얇은 원형의 물자국이 금세 생겨난다. 잔이 식는 속도를 따라 원이 퍼진다. 원형 모양의 물자국이 오늘의 시계를 대신한다.
테이블 표면에는 작은 흠집들이 복잡한 지도처럼 남아 있다. 누군가 오래전에 긁어 놓은 선, 무심코 흘린 우유가 남긴 하얀 가장자리, 콘센트로 이어지는 검은 선. 책을 읽기 전에 손바닥으로 그 지도를 한 번 훑어 본다. 목재의 결이 손끝을 지나가며 오늘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그 사이 옆자리에서는 얼음을 긁는 소리가 얕게 섞이고, 바 안쪽에서는 우유 거품을 내는 스팀 소리가 가끔씩 길게 오른다. 바깥의 흐름과 안쪽의 소리가 겹치다가, 어느 순간 서로의 높낮이를 맞춘다. 네모난 테이블 위에서 문장들이 조용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책을 펼치기 전, 나는 컵을 한 번 들어 올렸다가 자리에 내려둔다.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소리가 나지 않는 정도의 무게. 그 무게가 바로 오늘 읽을 분량을 가늠해 준다. 커피가 지나치게 뜨거우면 표지를 쓰다듬으며 잠시 기다려 보고, 미지근해지면 한 모금을 머금는다. 혀끝에서 목으로 내려가는 동안 눈은 천천히 목차를 훑는다. 목차의 숫자는 계단 같다. 급하게 오르지 않는다. 발을 살짝 올려만 놓아도 좋다. 카페 모서리 자리에서는 그런 걸 허락해 준다.
카페에는 늘 이름 모를 사람들이 있다. 앞 테이블의 누군가는 전화기를 바깥으로 가져가고, 누군가는 노트북 뚜껑을 살짝 올렸다가 닫는다.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막 할 일을 끝낸 사람도 있다. 그 움직임을 바라보다 보면 문장 하나가 불쑥 떠오른다. “여기서는 모두가 잠깐씩 멈추는구나.” 나는 그 말을 속으로 다시 써 본다.
잠깐의 멈춤이 길이 되어 있을 때, 그 길에는 종종 따뜻한 냄새가 깔린다. 버터와 설탕이 약한 불에서 천천히 녹는 냄새. 그 냄새가 나를 붙들어 앉힌다. 설탕 포장지를 뜯는 소리는 늘 작게 ‘사각’ 하고 끝난다. 그 소리 뒤에 고요한 순간이 이어진다. 설탕 알갱이가 컵 벽을 따라 내려가며 작은 별빛처럼 반짝인다. 나는 그 반짝임을 잠깐 바라본다. 읽을 문장을 고르는 일도 비슷하다. 크게 흔들거나 뒤섞지 않고, 가만히 내려앉도록 둔다. 문장이 저절로 바닥에 닿을 때까지 기다린다.
모서리의 시간은 잔잔히 흘러간다. 시곗바늘이 움직이지 않아도, 종종 정확하다.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출입문이 몇 번 열렸다 닫힌다. 유리문이 가져오는 바람이 페이지를 아주 살짝 들어 올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놓는다. 바람이 하는 일과 내가 하는 일이 비슷해 보인다. 들고 놓는 일. 붙잡지 않고 살포시 받쳐 주는 일. 다음 문단으로 넘어갈 때마다, 테이블 위 물자국의 지름이 조금 더 커진다. 원이 커지는 만큼 마음은 오히려 작아진다. 작은 마음은 글씨를 또렷하게 만든다.
가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액자를 본다. 카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액자 속 좁은 골목 사진은 자꾸 떠오른다. 그 골목에도 비슷한 모서리가 있었을거다. 우산이 모여 드는 각도, 담소가 몰려드는 그늘. 사람들은 각자의 모서리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기다리고, 적고, 조금 마시고, 조금 읽는다. 이런 행위들이 쌓여서 비로소 나만의 자리를 만든다.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면, 마음의 속도가 그 자리를 닮아 간다.
책을 접고 잠깐 쉬는 동안, 나는 코스터를 손톱으로 톡 건드린다. 원판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진동이 금세 멎는다. 멎는 지점에서부터 다시 문장이 이어진다. 어떤 날은 한 장도 못 넘기고, 어떤 날은 서너 장이 훌쩍 지나간다. 둘 다 괜찮다. 카페 모서리 자리는 내가 읽지 않은 분량으로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시작했느냐 아니냐만 묻는다. 시작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다독여 준다.
오후의 빛이 유리컵을 거쳐 테이블로 내려오면, 목재의 색이 한 톤 더 따뜻해진다. 그때 나는 책을 덮고 표지를 한 번 쓸어본다. 손바닥의 온도가 종이로 아주 조금 옮겨 간다. 그 정도면 된다.
누군가의 트레이가 내 테이블 모서리를 스치며 지나간다. 흐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컵을 들어 남은 한 모금을 천천히 비우고, 코스터 위의 마지막 물자국을 눈으로 담는다. 모서리에서 멎었던 시간이 다시 거리로 흘러가도, 원의 흔적은 잠깐 남는다. 그 잠깐이 오늘 내가 고른 문장이다.
문을 밀고 나가는 순간, 바깥의 공기가 조금 차갑다. 거리의 소음이 다시 몸에 붙는다. 그런데도 나는 걸음을 서두르지 않는다. 카페 안에서 멎었던 흐름이 이제는 나를 따라 나오며 보폭을 조용히 맞춘다. 나는 가방 속 책등을 한 번 더 눌러 본다. 모서리에서 시작한 읽기가 거리 위의 호흡을 바꾼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면서도 문장 하나가 마음의 안쪽에서 계속해서 낮게 울린다. 오늘은 그 울림만으로 충분하다.
모서리에서 배운 속도로, 남은 하루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