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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이 위로 스며드는 빛

단어 하나가 틀어주는 방향

by 김하종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책을 식탁 가운데 펴 둔다. 그렇다고 늘 읽는 것은 아니다. 김이 오르내리는 틈에 눈이 알아서 한 문단을 훑는다. 긴 문장은 금방 사라지지만 단어 하나가 오늘의 방향을 살짝 틀어준다.


오늘의 단어는 ‘잔상’이었다. 머그컵 바닥에 생긴 둥근 물자국을 보며 조용히 옮겨 붙인다. 잔상은 지우지 않아도 옅어진다. 아침을 시작하는 마음도 그렇다.


집을 나서 계단을 내려가면 현관 유리문 밖으로 낮은 햇빛이 들어온다. 빛이 바닥에 사각형을 만들면 어젯밤 읽던 책의 문단 모양이 겹쳐 보인다. 사각형 위를 지나며 발걸음을 약간 늦춘다. 읽는다는 일은, 아마도 삶에서 같은 모양을 찾아내는 일에 가깝다. 그 모양을 따라 걷다 보면 호흡이 일정해진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눕는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누군가는 어젯밤의 여운으로 멍하니 선다. 그때 아침의 단어를 속으로 한 번 더 불러본다. 잔상. 지나간 장면이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 어제의 피로도 그렇고, 어젯밤의 한 문장도 그렇다. 버스 문이 열릴 때, 잔상은 자연히 다음 장면으로 옮겨 탄다.


사무실 복도에 놓인 작은 화분 옆을 지날 때마다 물 주는 시간을 가늠한다. 흙 표면이 약간 말랐다. 한낮의 햇빛이 창문을 비스듬히 통과해 잎맥을 환하게 만든다. 어제 읽은 문장 중 식물의 느린 호흡에 관한 구절이 떠오른다. 그 말을 떠올리자 복도 끝까지 걷는 속도가 조금 느려진다.



읽는다는 건 단어를 늘어뜨리는 일이 아니라, 단어 하나가 틀어놓은 각도를 따라 속도를 바꾸는 일 같다. 빠른 것들은 여전히 빠르고, 느릴 수 있는 것들은 한결 느려진다.


오후가 깊어지면 모니터 아래로 빛이 조금씩 내려앉는다. 문서를 정리하다가 문장 하나에 걸린다. 단어를 바꿀지, 문장의 호흡을 바꿀지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책에서 익힌 리듬이 손끝으로 조금씩 전해진다. 길게 늘어뜨리던 문장을 두 토막으로 나누자 말이 제자리를 찾는다. 글쓰기든 메일 한 줄이든, 결국 숨의 길이부터 정해야 한다. 이 또한 책 덕분에 안다.

복사기 앞에서 종이가 나오는 모습을 잠깐 바라본다. 한 장, 한 장, 고르게 미끄러져 나온다. 며칠 전 읽은 소설의 장면이 조용히 겹쳐진다. 비슷한 리듬이 다른 사물에서도 발견될 때 마음이 이상하게 안정된다. 책 속 허구가 현실의 물성과 나란히 선다. 읽는 동안과 읽고 난 다음이 별개의 시간 같지 않다. 같은 하루의 다른 결이다.


회의실에 들어가자 유리 위로 구름이 느리게 미끄러진다. 말이 길어질수록 구름을 한 번씩 따라가 본다. 누군가의 의견이 벽으로 몰릴 때, 책에서 본 근사한 근거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간격’이라는 단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주장과 사실 사이, 지금과 다음 사이에 필요한 일정한 간격. 그 간격을 기억하면 말의 높낮이가 부드러워진다. 오늘의 단어는 대화의 방향을 한 뼘쯤 틀어놓는다.

퇴근길, 마트에서 우유와 귤을 산다. 귤을 봉지에서 꺼내며 껍질의 작은 기포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걸 본다. 어릴 때 과학 시간에 보던 오렌지 껍질의 단면이 떠오른다. 책장이 아니라 과거의 책상에서 올라온 잔상이다. 귤 한 조각을 입에 넣자 신맛이 먼저 올라오고, 달큰한 향이 늦게 따라온다. 오늘 읽은 문장도 그렇다. 향이 먼저 오고, 의미는 느리게 남는다.


집에 돌아오면 방 안 공기가 나에게 다가온다. 스탠드 불을 켜면 책의 표면이 한 톤 밝아진다. 오늘은 굳이 책갈피부터 찾지 않는다. 아무 데나 펼친 뒤 앞뒤로 한 장씩만 넘겨 본다. 이야기를 따라가려 하기보다 문장의 결을 손으로 쓰다듬는 일에 가깝다. 그 결을 따라 손바닥을 움직이다 보면 몸의 긴장이 풀어진다. 페이지는 손과 눈의 속도를 서로 맞추는 장소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바닥에 앉는다. 드럼이 도는 둔한 리듬이 창틀의 바람과 묘하게 맞는다. 소설에서 보던 바다 장면이 떠오른다. 파도가 아니라 세탁기 소리에 실린 바다다. 허구가 현실을 덮는 게 아니라, 현실이 허구의 틈을 빌려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이 좋다. 책은 현실을 도망치게 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의 온도를 조금 바꿔 줄 뿐이다.

저녁 늦게 창밖을 보니 맞은편 아파트 십자형 복도가 한 칸씩 켜졌다 꺼진다. 조명이 만든 사각형들이 아침에 본 사각형과 이어진다. 하루의 첫 사각형과 마지막 사각형이 서로 인사한다. 책의 장과 장이 맞물리듯, 빛과 빛도 맞물린다. 그 사이에 내가 서 있다. 읽는 사람으로, 사는 사람으로.


책을 덮고 스탠드 불을 낮춘다. 오늘 남은 문장을 억지로 떠올리지 않는다. 단어 하나면 충분하다. 아침의 ‘잔상’ 대신 밤의 단어를 골라 본다. ‘여유’.


내일 아침 같은 자리에 앉으면, 이 단어가 또 다른 모양을 데려올 것이다. 읽는다는 건 큰 깨달음보다 작은 모양을 하루에 한두 개씩 더 배우는 일 같다. 배우고 잊고, 다시 배우면서 하루의 표정이 아주 조금씩 바뀐다.


불을 끄자 창문이 거울처럼 변한다. 방 안의 어둠이 내 얼굴에 얹힌다. 낮에 읽었던 문장들이 멀리서 희미하게 손을 흔드는 것 같다. 부르지 않아도 올 것이고, 붙잡지 않아도 남을 것이다.


책은 내 삶을 극적으로 바꾸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삶을 조금 다르게 보게 했다. 그 조금이 하루를 움직인다. 내일도 같은 빛이 종이 위로 스며들 것이다. 나는 그 빛 근처에 앉아, 단어 하나가 틀어주는 방향으로 천천히, 살아보듯이 읽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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