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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접힌 모서리 근처에서

멈춤이 남긴 작은 온기

by 김하종

책 때문에 울컥했던 날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책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끝까지 읽지 못한 나를 오래 미뤄 둔 마음 때문이었다. 책상 모서리에 비스듬히 쌓인 ‘언젠가’의 더미를 정리하다가, 오래된 서점 영수증이 한 권의 책갈피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합계 금액 아래 인쇄된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그 평범한 문장을 보는 순간 목이 잠겼다. 즐겁지 않았으니까. 즐겁고 싶었지만 자꾸 실패했다고 여겼으니까. 반짝이도록 표지를 닦아 두고도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던 습관이 어깨를 짓눌렀다.


책장에서 한 권을 꺼냈다. 뒷표지 추천사 잉크가 가볍게 번져 있었다. 여름 땀이 스민 흔적일지도 모른다. 첫 장을 펼치자 오래 닫혀 있던 종이 냄새가 둔탁하게 올라왔다. 문장을 읽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미안했다. ‘미안, 너를 오래 닫아 두어서.’ 손끝으로 문장 사이 여백을 한 번 훑었다. 누군가의 얼굴 선을 달래듯 조심스럽게. 그 순간 눈이 먼저 뜨거워졌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다이어리가 떠올라서였다. 빈 칸이 길게 이어진 달. 비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꾸짖던 칸들. 그 사이사이에 “다음 주부터”, “이번 주말”, “휴가 때” 같은 약속이 쓰였다가 지워지고, 다시 쓰였다가 또 지워진 흔적. 그 흔적을 나는 ‘나라는 사람’의 실패로 받아들여 왔다. 책장이 무거웠던 건 책의 쪽수가 아니라, 그 시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울컥함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날은 화면을 끄고 조용히 앉아 첫 단락을 넘겼을 뿐인데, 평범한 문장 하나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그날 그는 잠깐 멈춰섰다.” 단지 그 한 단어, ‘잠깐’이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오랫동안 잠깐 멈추는 법을 잊고 살았다. 다음 스크롤, 다음 할 일, 다음 목표로만 밀려가며 ‘잠깐’과는 마주 앉지 못했다. 그 짧은 단어가 가슴 안쪽을 눌렀다.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오래 울고 싶진 않았지만, 눈물은 제 속도로 흘렀다. 곧 알 수 있었다. 그 눈물은 죄책감과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죄책감은 가시처럼 같은 자리를 찌르지만, 그날의 울음은 따뜻한 물처럼 안으로스며들었다. 비난이 아니라 회복에 가까운 울음이었다.


며칠 뒤 출근길 버스 안에서 또 한 번 마음이 흔들렸다. 맞은편 사람 하나가 책을 꺼내 들었다. 표지는 소박했고, 모서리는 손때에 둥글게 닳아 있었다. 그는 첫 페이지를 넘기며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누구에게 인사하듯. 그 작고 단정한 몸짓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내 무릎 위 가방은 그날따라 가벼웠다. 책이 없었다. 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조금 부끄러웠다. 집에 돌아와 가방에서 책을 꺼내 책상 한가운데 조용히 놓았다. 그게 그날의 전부였지만 마음 한쪽이 따뜻해졌다. 아무도 모르게, 나와 단 한 번 인사를 나눴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제는 안다. 책 때문에 울컥하는 날은 사실 나 때문에 울컥하는 날이라는 것을. 잘 읽지 못한 나, 끝까지 가지 못한 나, 그런 자신을 오래 변명만 하던 나. 그런 나를 위해 책이 잠시 등받이가 되어 준다. 그리고 그 울음이 지나가면 작은 결정이 남는다. ‘그래도 오늘 한 줄은 읽자.’ 다짐이라기보다 부탁에 가까운 말. 부탁은 다짐보다 오래 간다. 오늘의 나에게 조용히 부탁한다. 오늘의 나를 그냥 지나치지 말아 달라고.


어느 일요일엔 서점에 갔다. 새 책 표지를 쓰다듬는 사람들 사이로 내 예전 모습을 보았다. 과하게 고르는 손, 과하게 계산하는 눈.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에 앉아 발소리를 들었다. 한 칸씩 내려앉는 그 소리가 책장 넘기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서가 사이를 걷다 한 권을 빼 들었다. 그날은 가격표를 뒤집어 보지 않았다. 대신 첫 장의 종이를 귀 가까이 가져가 살짝 구겼다 폈다. 바스락 소리가 안심을 줬다. 살아 있는 종이의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날의 읽기를 절반쯤은 마친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로수 잎 하나가 내 눈높이에서 흔들렸다. 손바닥을 내밀어 잠깐 받쳐 보았다. 잡히지 않는 것을 잠시 떠받치는 느낌. 책을 펼치는 일도 그렇다. 무언가를 완전히 붙잡는 일이 아니라, 떨어지지 않게 잠시 받쳐 주는 일이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스탠드를 켰다. 따뜻한 조명이 종이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어디까지 읽을지는 묻지 않았다. 다만 오늘의 얼굴로 한 번 마주 보기로 했다. 그게 그날의 약속이었다.


시간이 지나 책 때문에 울컥했던 밤들을 떠올려 보면, 눈물의 모양이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엔 실패의 모양이었고, 다음엔 안도의 모양이었고, 나중엔 반가움의 모양이 되었다. ‘아, 나는 아직도 무언가에 흔들릴 줄 아는 사람이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또렷해졌다. 책은 내 삶을 거창하게 바꾸지 않는다. 다만 오늘의 나를 내 쪽으로 조금 끌어당긴다. 그만큼이면 충분하다. 울컥함이 지나간 자리에는 늘 작은 자리 하나가 남는다. 잠시 앉아 한 줄 읽어낼 수 있을 만큼의 폭.




어느 밤엔 책을 덮고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커튼을 들었다 내렸다. 바람의 속도에 맞춰 내 호흡을 낮췄다. 그때 생각했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책이 나를 울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울어도 괜찮은 공간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라고. 책은 직접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여백을 내어 준다. 단순한 모양의 여백. 그곳에는 울음도 웃음도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다. 나는 그 여백을 믿는다. 그 마음으로 내일의 페이지에 또 한 번 손바닥을 올려둘 힘을 얻는다.


그날 이후로 다이어리의 빈 칸을 다르게 본다. 꾸짖음이 아니라 쉬어가는 칸.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좋고, 한 단어만 남겨도 좋은 자리. 어떤 날은 ‘여기까지’라고만 적는다. 두 글자에 하루가 보이고, 그 하루가 내일의 첫 줄로 이어진다. 펜을 내려놓으면 울컥함은 사그라진다. 조용해진 울컥함은 따스한 기운으로 올라온다. 온기는 오래가고, 오래 지나 다시 나를 불러낸다.


그리고 또 어느 밤, 불을 끄고 눕기 전에 책등을 한 번 쓸어 본다. 표면의 온도는 여전히 손보다 차갑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하다. 책 때문에 울컥했던 날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그 울컥함 덕분에 나는 다시 돌아오는 길을 알게 되었으니까. 내일도 같은 길로 돌아올 것이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한 문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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