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책을 펼치기 전, 아주 작은 용기
퇴근길 버스에서 창밖을 보다가, 문득 가방 속 책이 떠오른다. 지난 주말 서점에서 골라 담을 때만 해도 살짝 들떠 있었다. 계산대의 비닐보다 매끈한 표지, 새 종이 냄새, 첫 장을 넘기면 내 삶도 한 페이지를 넘길 것만 같던 마음. 그런데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닫는 순간부터 책은 이상하게 무거워진다. 씽크대에 컵을 놓고, 세탁기에 빨래를 던져 넣고, 전자레인지가 한 번 울 때마다 “조금만, 이것만”이라는 말 뒤로 언제나 책은 뒤로 미루어 둔다. 손이 책등으로 가려 할 때마다 주머니 속 휴대폰에 먼저 몸을 기울인다.
우린 이미 알고 있다.
그 짧은 확인이 늘 긴 밤의 시작이 된다는 것을.
가끔은 책장 앞에서 서서히 숨이 가빠진다. ‘지금 펼치면 집중할 수 있을까? 오늘도 첫 장만 만지작거리다가 덮는 거 아닌가?’ 어젯밤 이마에 ‘툭’ 떨어졌던 표지의 감각이 생생하다. 나만 이런 건가 싶어 마음이 더 작아진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 모두의 밤은 비슷하다. 한 겨울, 버스 정류장 유리에 닿은 손바닥 온기가 남았다 사라지듯, 결심이라는 것도 금세 식는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의심하고, 책을 의심하고, 결국 책 읽기라는 행위 자체를 의심한다. 과연 이 책 하나 읽는다고 내 삶이 조금이라도 바뀌기는 할까?
어느 늦여름 밤, 여름이 끝난다고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한다고, 작은 목소리로 마음의 주문을 걸었다. 그렇게 두 계절이 지나고 나서야 생각난 장면이 있었다.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 줄 서 있던 어린 나. 키가 책꽂이만큼밖에 안 되던 시절에는 세 가지를 믿었다. 책은 재미있다. 나는 호기심이 많다. 오늘 밤은 길다. 그 믿음을 누가 빼앗아 갔을까. 바쁘고 지친 생활? 알림과 스크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부터 ‘잘 읽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스스로를 너무 가두어 버렸다. 잘 읽어야 하니까 아예 시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 책을 쓰려 마음먹고부터 나는 책상에 앉아 작은 의식 하나를 행한다. 창문을 열어 저녁 공기를 한 번 들이고, 스탠드 불을 켠 다음, 책 표지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본다. 그 순간에는 잠시 내 생활의 소음들이 멈춘다. 오늘의 나와 책이 인사하는 아주 짧은 시간. 인사만 하고 덮어도 괜찮다고, 속으로 허락하는 시간이다. 엄숙한 의식이나 선언 따위가 아니라 책 한 권과 행한 아주 작은 약속 하나. 신기하게도 그렇게 허락을 넓혀 갈수록, 책과 나 사이의 거리가 조금 덜 낯설어졌다. 읽지 못한 날도 기록하지 않고, 읽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간혹 만난 문장을 마음속에서 오래 굴려 보았다. 배달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 엘리베이터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 전 한 박자. 그렇게 문장 하나가 하루의 틈 사이사이에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이 노력하고 있다. 잘 먹기 위해, 잘 자기 위해, 잘 일하기 위해. 그런데 책 읽기는 늘 ‘남는 시간에’ 뒤로 미뤄 두었다. 남는 시간은 대개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만큼은 다른 방식으로 시작하고 싶다. 거창한 계획도, 새벽 다섯 시의 기적같은 각오도 없이, 오늘의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낼 수 있는 가장 조그만 용기를 꺼내어 보는 것. 책장을 향해 발끝을 반 발짝 내딛는 것. 표지를 넘길까 말까 망설이는 그 3초를 그냥 지나가게 두지 않는 것. 실패를 예감하는 대신, ‘시작했으니 이미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주는 것. 그런 아주 사소한 용기에서부터 시작하자.
나는 믿는다. 책 읽기는 나의 성실함의 기준을 평가하는 시험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로하는 가장 쉬운 기술이라고. 어떤 날의 책은 새 정보보다 “괜찮다”라는 감각을 먼저 건네준다. 나만 느린 게 아니라고, 세상이 빠른 날엔 느림의 한 문장이 우리를 구한다고. 어떤 날의 책은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냥 덮으면 된다. 덮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덮고 난 뒤에도 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내일의 나도 여전히 이곳에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내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삶은 조금 달라진다.
밤이 깊어갈수록 문장들은 더 낮은 목소리로 다가온다. 베란다 유리창에 비치는 내 얼굴은 낮보다 솔직하고, 방 안의 공기는 낮보다 정직하다. 그 공기 속에서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다 보면, 미처 몰랐던 내 생각의 모양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누구의 속도도 아닌, 나의 호흡으로. 읽는 동안엔 누가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책은 나에게 칭찬 스티커를 붙여 주지도, 경고장을 건네지도 않는다. 다만 묵묵히 다음 문장을 건네올 뿐이다. 그 단순함이, 요란한 하루 끝에 이상하리만큼 거대한 마음의 품을 만들어 준다.
이 책은 여느 독서법 서적과는 달리 방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당신과 나의 일상을 함께 들여다보고, 우리가 왜 책을 펴기까지 그렇게 오래 망설였는지, 그 망설임을 어떻게 다정하게 건너갈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큰 목표 앞에 작아지는 마음, 표지만 쓰다듬다 덮는 밤, 텅 빈 독서노트, 책갈피 대신 냅킨 한 조각… 그런 사소한 장면들이 쌓여 당신의 책 읽는 시간이 된다면, 그게 가장 좋은 시작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중요한 건 많은 페이지 쪽수가 아니라 오늘도 책 표지를 열어 보겠다는, 아주 작은 마음이라는 것을.
그러니 오늘 밤, 잠들기 전에 책등을 한 번 잡아 보자. 너무 버겁다면 들었다 내려놓아도 좋다. 표지를 넘기고 첫 문장을 읽다가 마음이 다른 데로 걸어가면, 그 길을 따라 잠시 산책해도 괜찮다. 돌아오는 길에 문장 한 조각만 주워 오면 그 뿐이다. “나는 오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라는 그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 내일은 내일의 한 조각을 더하면 된다. 그렇게 조각들이 모이면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쌓이면 어느 날 우리가 기다리던 모습이 탄생하고 말 것이다. 읽는 사람으로.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책을 펼치기 전, 필요한 건 그 어떤 기술이나 방법론보다 마음의 체온이다. 서랍 속 책갈피를 다시 꺼내며, 우리 각자의 속도로, 우리 각자의 온도와 조도에서. 오늘의 우리는 그 정도의 용기라면 충분히 가지고 있다. 이제 손바닥만 한 용기를 꺼내, 표지 위에 살짝 올려 보자.
그것이 이 책의 첫 페이지이고, 당신 독서의 첫 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