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온도
가을 저녁은 퇴근이 조금 일러도 길 위에서 더디게 흘러간다. 바람은 얇게 불고, 사람들은 각자의 무게에 눌려 정류장 한켠에 조용히 선다. 정류장 지붕 유리에 김이 얇게 오를 때면, 나는 습관처럼 손바닥을 올려 둔다. 둥근 온기가 번졌다가 금세 사라진다. 그 짧은 사이에 숨이 고르고, 낮에 남은 말들이 한 걸음 물러선다. 지친 퇴근길 정류장에서 잠시나마 세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온전한 '나'의 시간을 회복하는 순간이다.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표지의 미세한 스크래치, 모서리에 닳아 생긴 하얀 선, 종이에서 나는 희미한 냄새가 손끝으로 올라온다. 머리로 읽기보다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으로 먼저 만져 본다. 누구의 이야기인지, 무슨 이야기인지 미리 단정하지 않는다. 그저 책을 들고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저녁의 중심이 나에게로 옮겨지는 느낌이 든다. 전광판의 도착 시간이 줄어드는 동안 차례를 훑는다. 제목들이 헤드라이트처럼 스쳐 가고, 그중 하나가 눈에 걸린다. 뜻은 아직 이해하기 어렵지만 소리가 먼저 선명하다. 입술만 움직여 첫 문장을 따라 읽어 본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혀의 모양이 바뀌는 그 감각이 오늘 하루의 방향을 살짝 틀어 준다.
버스가 들어올 기미가 보이면 페이지 귀퉁이를 가볍게 접는다. 손바닥만 한 접힘이 오늘 하나의 표지가 된다. “여기에 있었다.” 나에게만 들리는 확인 한 마디. 누구에게 보여 줄 것도 아니다. 내일의 나를 위한 작은 표식 하나면 충분하다. 책을 덮고 한 발 물러서면, 마음속에 아주 얇은 만족감이 스며든다. 크게 이룬 일은 아니지만, 나는 방금 내 하루의 자리를 찾아 잠깐이나마 앉았다가 나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버스 안 공기는 낮보다 따뜻하다. 코트의 섬유 냄새, 누군가의 짙은 커피 향, 지도 앱을 확인하는 엄지손가락의 빠른 움직임이 섞여 있다. 자리가 비면 앉고, 아니면 살포시 기대어 선다. 창밖은 초콜릿색으로 일찍 어두워지고, 불빛이 젖은 종이의 잉크처럼 퍼진다. 무릎 위의 책은 조용히 식는다. 나는 방금 읽은 단어를 속으로 다시 불러낸다. 그렇게 걸린 단어들은 의미보다 먼저 온도를 남긴다. 그 온도가 집까지 따라오면 좋겠다.
가까운 정류장 이름이 들리면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진다. 그 사이에서 나는 가방을 여미고, 접어 둔 페이지를 한 번 쓸어 본다. 많이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괜찮다. 오늘의 나는 오늘의 페이지에서 멈춰도 된다고, 그 말이 조금씩 믿어진다. 믿음이라는 건 늘 한 발짝 늦게 오지만, 한 번 오면 그 자리를 오래 지킨다.
내리는 순간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가 바람을 타고 미끄러진다. 나는 그 종이를 한 번 눈으로 쫓다가, 코끝에 묻은 은행 냄새를 느낀다. 손바닥엔 아직 종이의 마찰감이 남아 있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벗고 등을 편다. 스위치를 올리자 스탠드 불빛이 책상 위로 둥글게 내려앉는다. 정류장에서 시작된 저녁의 속도가 집 안으로 그대로 스며온다. 물 한 잔 마시고, 책을 책상 가운데 가만히 놓는다. 다시 펼칠 수도 있고, 오늘은 여기까지일 수도 있다. 두 경우 모두 나쁘지 않다.
어떤 밤에는 그 접힌 귀퉁이만 쓰다듬다가 멈춘다. 그런 밤의 책은 괜스레 고맙다. 돌아오는 길에 내 손을 놓지 않고 함께 걸어 준 동반자 같아서다. 다른 밤에는 접힌 부분을 펴고 한 단락을 더 읽는다. 문장 사이사이에 묻은 빈 호흡들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다 늦은 빨래를 널고 들어온 밤처럼, 늦게라도 해야 했던 일을 마친 가벼움이 남는다.
복도에서 문 닫는 소리가 나고, 엘리베이터가 한 번 내려갔다가 올라간다. 책갈피를 곧게 끼워 두고 스탠드를 끄려다, 마지막으로 표지를 한 번 더 쓸어 본다. 분주하게 흘러갔던 낮의 회사 동료들 대신 오늘의 내가 내 옆자리에 앉아 준 느낌이 든다. 많이 읽지 않아도, 잘 읽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내 속도대로 돌아와 있었다.
불을 끄면 방은 금세 조용해진다. 어두운 곳에서는 작은 소리가 크게 들린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찬 공기, 벽을 타고 흐르는 냉장고의 낮은 진동, 욕실에서 아주 늦게 마르는 수건의 가벼운 음색. 그 소리들 사이로 아까의 단어가 다시 떠오른다. 뜻은 여전히 모호하지만, 오늘의 소리만은 선명하다. 나는 그 소리를 머릿속에 한 번 더 새기고 눈을 감는다. 내일의 나는 그 단어를 또 다른 온도로 읽을지도 모른다.
내가 책읽기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같은 단어에도 매일 다른 내가 도착한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돌아온다.
정류장의 유리처럼 잠시 식었다가도 금세 데워지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