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말소환권
<주말 소환권>
그와 사적인 카톡을 오가던 언젠가, 그가 휴가였던 날. 사무실을 비운 그가 나에게 업무를 부탁해 왔다. 어떤 엑셀파일을 수정해서 제출해 달라.(자기 팀원한테 부탁해도 되지 않을까? 나한테 왜 부탁을 하지?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다닥 완료 후, 처리되었다고 연락을 했다. 그가 고맙다고 하며 언젠가 주말에 자기를 소환? 할 수 있는 소원권을 주겠다고 했다. 내가 자기를 주말에 자주 불러대는데, ‘나오세요, 날이 좋아요’하는 나와 ‘싫다, 쉬고 싶다’ 하는 자기와의 실랑이하는 수고를 덜어주겠다는 요량이었다. 되게.. 건방지고 자존심 상하게 하는 소원권이나, 아쉬운 사람은 나였으니.. 단숨에 오케이를 외쳤다. 언젠가, 그 소원권을 쓰게 될 때 아주 건방지고 그를 자존심 상하게 하리라 마음먹으면서.
(1편에 이어서)
그에게 나의 마음을 말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설렘과 불안이 함께였던 내 마음 때문에,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말해야겠다고 다짐한 날부터 디데이까지 며칠간 체한 듯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술을 잘 먹는 사람들이 말하는 숙취가 이런건가 싶을정도로 음식만 보면 욱 하고 속이 울렁거리고, 식사를 하게 되더라도 ‘양껏’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고백을 하기로 한 호기로운 마음과는 별개로, 오만가지의 걱정을 하고 있던 게 몸이 느끼기에는 스트레스였나 보다. 이런 솔직한 몸뚱이.
디데이는 그 주 일요일이었다. 전날 연락을 해서 다음날 약속을 미리 잡을까? 아님 그냥 찾아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당일에 그를 소환하기로 했다. 내가 정당하게 얻은 <주말소환권>으로.
당일 오후 2시쯤 예쁘게 차려입고 그가 사는 집 근처 카페를 갔다. 날이 좋았던 날, 한강에서 놀고 나서 아쉬운 마음에 직원들 다 같이 그가 사는 집 옥상에서 그늘막 텐트를 치고 놀았던 적이 있기 때문에 집 근처로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커피를 시키고, 마음의 준비를 다하고. 카톡을 열어 연락했다. ‘대리님, 주말소환권 쓸래요’라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반항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오늘은 집에서 쉬자’고. 예상했던 반응이기에, ‘대리님 집 앞 카페에 있으니 여기 나오는 건 어렵지 않죠?’라고 하니 그가 ‘집 앞? 정말 체력이 대단하다’는 둥 궁시렁대더니 알겠다고 했다.
그가 카페에 나타났다. 비에 젖은 옷을 툴툴 털면서 들어오다가 내가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모습을 보더니 흠칫 놀라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혼자 왔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긴 단둘이 본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약간 당황하며 앉는 그에게 음료를 주문해 주고 음료가 나올 때까지 5분 정도는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기다렸다. 그러다가 그가 ‘왜 왔어요?’라고 물었다. 난 ‘할 말이 있어서 왔죠’라고 했다. 그가 ‘할 말이 뭔데요?’라고 물었다. 난 ‘할 말이 뭐 일거 같아요?’라고 물었다. 그는 ‘나야 모르죠.’라고 했다. 모르긴. 이런 황금 같은 주말에 비 오는 날 이쁜 치마를 입어대고서 쓸데없는 얘기 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이런 마음이 들었지만 꾹 누르고, 세상 순수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대리님이 좋아요’
뭐 이보다도 간결한 고백이 있나.
혹시라도 차이면 엉엉 울게 될 것 같아 그가 오기 전 미리 가져다 놓은 많은 티슈들을 그가 먼저 땀을 닦는데 쓰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좋아요? 왜요?’라고 묻길래 순수한 얼굴을 거두지 않은 상태로 ‘그냥 다 좋아요’라고 답했다. 연신 땀을 닦더니 나보고 몇 살인지를 물어봤다. 다 알면서 왜 묻지. 땀을 닦으면서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5살 나이차이야 뭐 고민할 것은 아닌 거 같고, 아마 사내연애에 대한 고민인가..? 그래, 그건 나도 고민이 되긴 하니까. (나중에 어느날, 그는 내가 고백하러 갔던 날 땀을 닦으며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에 대해 말해주었다) 근데 일단 내 마음이 그렇다니까? 그거에 대한 답은 하시지.
그의 생각을 헤집기 위해, 내가 대리님한테 마음 있는 거 진즉에 알지 않았냐, 다 알고 그동안 받아준 거 아니냐 난 그렇게 생각했다(받아준거에 대해 책임을 져라 라고까지는 하진 않았다)라고 하니 그도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도 나에게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언제가부터 내가 자기의 밥을 챙기고, 커피를 챙기고 심지어 일조량까지 신경 쓰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주말엔 죽은 사람처럼 집에만 콕 박혀 있는 그를 매주마다 불러내는 나를 보며 그의 주말 루틴을 잘아는 친한 친구들은 그에게 ‘도대체 널 주말마다 불러대는 사람이 누구냐, 잘해봐라, 그 사람 너한테 마음 있나 보다’라는 참견도 받았다고 한다. 현직장에서 하반기쯤 퇴사를 생각하고 있던 그는 퇴사를 하면서 나에게 마음을 말하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딱! 선수를 친 거고.
한참 생각하던 그는 ‘오케이, 만나요 우리’라고 했다.
난 기쁨과 안도감에 그에게 환하게 웃어주었다.
좋았어. 직장도 지켰고, 사랑도 쟁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