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의 막을 뚫고 머리를 내미는 순간, 세상은 기다렸다는 듯 폭력적인 볼륨으로 그녀를 덮쳤다.
“푸하-!”
가장 먼저 터져 나온 것은 그녀의 거친 숨소리였지만, 이내 보트 엔진의 굉음과 선체를 때리는 파도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스웨덴 커플이 토해내는 날카로운 환호성이 고막을 찢을 듯 파고들었다.
“오, 마이 갓! 하나! 봤어? 봤지? 그 크기 봤어? 믿을 수가 없어!”
그들은 마스크도 벗지 못한 채 서로를 으스러져라 껴안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들의 적나라한 환희는 너무나 눈부시고 뜨거웠다. 방금 전까지 차가운 심연 속에서 죽음을 만지작거렸던 그녀의 축축하고 어두운 속내와는 결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그녀는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경련하듯 떨렸다.
‘그래, 당신들은 운이 좋았어. 그 운 덕분에, 나도 덩달아 죽지 못했고.’
보트 난간을 잡고 몸을 끌어올리는 팔에 묵직한 중력이 걸렸다. 장비를 해체하는 손길은 여느 때보다 무겁고 더뎠지만, 동시에 섬뜩할 정도로 단호했다. 손바닥에 박인 노란 굳은살이 차가운 공기 탱크의 금속성을 밀어냈다. 머리는 멈췄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살기 위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잔압을 확인하고, BCD의 공기를 빼고, 레귤레이터의 먼지 마개를 닫고, 축축하게 몸을 조여오던 젖은 수트를 벗겨내는 일. 그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의 리듬이 방금 전 심연에서 느꼈던 현기증 나는 허무로부터 그녀를 현실의 갑판 위로, 억지로 끄집어 올렸다.
센터로 돌아오는 길, 픽업트럭 짐칸에 앉아 그녀는 계속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입안이 바짝 말라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었다. 짠 바닷물에 절여진 혀끝에서 쓴맛이 났다. 아니, 쇠 맛이었다.
그녀의 뇌는 아직 혼란의 뻘밭을 헤매고 있었지만, 위장은 정직하고 맹렬하게 아우성치고 있었다. ‘비어 있음.’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공허함이 아니었다. 위산이 위벽을 긁어대며 ‘무언가를 집어넣으라’고 비명을 지르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허기였다. 클로드의 장례식 이후 며칠간, 그녀의 위장은 알코올과 슬픔, 그리고 죄책감이라는 액체로만 채워져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육체가 ‘죽음’을 거부하고 ‘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축축해진 다이빙 센터 로고가 그려진 티셔츠와 반바지를 벗어버리고 흠뻑 젖은 수영복만 남긴 채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코사무이 세관에서 굴욕과 눈물로 찾아왔던, 그 애증의 상자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뚜껑을 열자, 훅, 하고 끼쳐오는 시큼하고 매캐한 냄새. 섬의 달콤하고 나른한 과일 향과는 대척점에 있는, 썩기 직전, 가장 맹렬하게 자신의 맛을 응축한 발효의 냄새였다. 내가 이 섬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이 붉은 덩어리는 어둠 속에서 홀로 치열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 며칠 전만 해도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고 세관 직원들의 비웃음을 샀던 그 지독한 냄새가, 지금은 마치 폐부를 찌르는 구원의 향기처럼 느껴졌다.
잘 익다 못해 푹 쉬어버린 김치 포기를 꺼냈다. 그녀는 냄비에 물을 올리고, 도마도 없이 가위로 김치를 숭덩숭덩 잘라 넣었다. 붉은 국물이 튀어 싱크대와 그녀의 맨발에 핏자국처럼 얼룩졌다. 상관없었다. 참치 캔 하나를 따서 기름기 하나 남기지 않고 털어 넣었다. 거기에 한국에서 가져온 고춧가루를 듬뿍, 아주 듬뿍, 냄비가 시뻘겋게 질릴 때까지 뿌려댔다. 마치 독약을 제조하는 마녀처럼, 혹은 제(祀)를 올리는 무당처럼, 그녀는 비장하게 불을 올렸다.
보글보글. 찌개가 끓어오르며 붉은 기포가 터질 때마다 맵고 칼칼한 연기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기침을 콜록거리면서도 환기창을 열지 않았다. 눈이 따갑고 코가 아려왔지만, 그녀는 이 지독하고 강렬한 냄새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었다. 이것은 서울의 냄새가 아니었다. 엄마의 냄새도 아니었다. 지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야수 같은 그녀 자신의 냄새였다.
김이 피어오르는 하얀 쌀밥 위에 붉은 국물을 끼얹고, 푹 익어 흐물흐물해진 김치 조각을 얹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뜨겁고, 맵고, 짰다. 혀의 미뢰가 비명을 지르고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하아….” 그녀는 입을 벌리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심해 30미터의 냉기를 머금고 있던 위장 속으로, 펄펄 끓는 용암 같은 국물이 쏟아져 들어갔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통증이 뼛속에 박힌 한기를 쫓아냈다. 식사라기보다는 그녀 안의 죽음을 불태우는 화형식에 가까웠다. 이마와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흐물흐물해진 김치 줄기를 어금니로 짓이겼다. 마치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불안과 슬픔을 잘근잘근 씹어 으깨버리겠다는 듯이. 턱이 뻐근할 정도로 씹고, 또 씹었다. 마치 누군가와 싸우듯, 혹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메우듯, 맹렬하게 밥을 퍼먹었다.
강렬한 캡사이신이 뇌를 강타하자,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복잡한 생각들이 일시 정지되었다. 클로드의 죽음도, 자신의 죄책감도, 불투명한 미래도, 혀끝을 난도질하는 이 강렬한 통각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고통이 고통을 덮었다. 육체의 통증이 마음의 통증을 마비시켰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이마에서 흐른 땀과 눈에서 터진 눈물, 그리고 콧물까지 뒤섞여 턱을 타고 밥그릇 위로 뚝뚝 떨어졌다. 붉은 국물 위로 투명한 파문이 일었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그저 매운맛에 놀란 몸이 쏟아내는 정직한 생리 현상일 뿐이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울지 않고도 울 수 있어서. 그녀는 닦지 않았다. 몸 안의 모든 수분이, 모든 독소가, 묵혀둔 모든 슬픔이 땀구멍을 통해 비명처럼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게 살아있는 거였다. 고상하게 철학을 논하고 삶의 의미 따위나 찾는 게 아니라, 뜨거운 것을 삼키고, 땀을 흘리고, 혀끝의 고통에 몸서리치며 “아, 맵다, 아, 뜨겁다”라고 느끼는 것. 그녀는 문득 클로드가 왜 그토록 태국의 매운 고추 ‘프릭키누’를 씹어 먹으며 낄낄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이 자극적인 고통으로 자신의 텅 빈 공허를 메우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감각이라는 게 남아있음을, 이렇게 자학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당신은 틀렸어, 클로드.’
그녀는 입안 가득 씹고 있던 김치를 꿀꺽 삼켰다. 식도를 긁고 내려가는 뜨거운 덩어리가 느껴졌다.
‘당신은 하루씩 사는 법을 알려준다고 했지만, 결국 그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하지만 나는 먹는다. 나는 이 맵고 뜨거운 것을 기어이 삼키고, 땀을 흘리고, 내일 아침이면 부어오른 눈과 쓰린 속을 부여잡고서라도 또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게 당신과 나의 차이다. 나는 비겁해서, 겁이 많아서, 그리고 배가 고파서 죽지 못한다. 그리고 그 비겁함이, 그 구질구질한 허기가 나를 살게 한다. 살아남는다는 건 가장 치열하게 비겁해지는 일이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은 빈 그릇을 내려놓자, 기분 좋은 포만감만큼 거대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위장이 묵직하게 차오르자, 비로소 지구가 그녀를 당기는 중력이 느껴졌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그녀는 샤워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천장에서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가 ‘달달달’ 힘겨운 소리를 내며 미지근한 바람을 보내왔다. 그 바람이 젖은 땀을 식혀주는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서늘하고 상쾌했다.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철썩, 처얼썩. 조금 전, 깊은 바닷속에서 그녀를 찾아왔던 고래상어의 느릿하고 묵직한 꼬리지느러미 소리 같기도, 그녀의 심장이 다시 뛰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래, 먹었으니 됐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내일은 또다시 바다로 나가야 했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고, 바닥난 통장 잔고는 채워야 하고,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따가울 것이다. 클로드의 빈자리는 여전히 시리고 클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배가 불렀다. 그것으로 오늘 하루치 삶의 이유는 충분했다.
그녀는 깊은 잠 속으로, 꿈도 없는, 그러나 더 이상 죽음과는 다른 완전한 어둠 속으로, 이번에는 도망이 아니라 휴식을 위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