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라는 그녀의 본명이다.
하지만 안나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그녀는 안젤라가 아닌,
주로 '안나 엄마'로 불렸다.
안젤라는 세례명으로 이름을 삼은게 좋았다.
결혼 전, 아니 아이들을 낳기 전까지
일하던 직장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는 더 그러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여러 사람 앞에서 공표하는 것 같아서 뿌듯함이 컸다.
결혼을 하고 난임기간이 길어지고,
오랜 시험관 시술로 몸과 마음이 지쳐갈 때쯤
더욱 믿고 의지했던 건 성당, 아니 하느님이었다.
안젤라는 쉼 없이 기도하고 기도했다.
'제발 아기천사를 제게 보내주세요..'
'주님 뜻대로, 정성껏 보살피겠습니다..'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
안젤라는 쌍둥이를 임신했고
큰딸 안나와 작은 아들 요한이를 10분 간격으로 낳았다.
마흔이 넘은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된 것도 기뻤지만,
두 아이를 한 번에 안을 수 있어서 더욱 감사했다.
하느님 은혜에 보답이나 하는 듯이
안젤라는 쌍둥이 이름을 '안나'와 '요한이'로 지었다.
아이들도 분명 자기 이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처럼, 내 아이도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아가길 바랐다.
안젤라는 귀하게 얻은 두 아이를 정성 들여 키웠다.
온종일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매달렸다.
다니던 직장도 당연히 그만두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지만,
오랜 고민 끝에, 그리고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입학할 때까지 집에서 돌보기로 결정했다.
아이들의 식재료는 유기농으로,
조리 방법은 최대한 자연주의로,
인스턴트은 물론이고 과자, 사탕도 웬만하면 먹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영상 시청도 가급적 멀리해야 했기에,
신문지, 다 쓴 두루마리 휴지심, 나무젓가락 같은 것으로 놀잇감을 만들어가며 아이들과 놀아줬다.
안나, 요한이에게 안젤라는 엄마이자 선생님이었다.
친구가 없어도 둘은 서로 의지하면서 책도 보고 놀기도 잘 놀았다.
쌍둥이라서, 서로 친구가 되어 주어서 다행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하게 키운 아이들이 드디어 비로소 안젤라의 품에서 아주 천천히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초등학교 입학..
아이들은 씩씩하게 학교로 걸어 들어갔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안젤라는 괜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내 품 안에만 있던 내 아이들이, 이제는 세상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안젤라는 불안하고 초조했다.
잠깐 남편에게 아이를 맡긴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오랜 시간 아이들과 떨어져본 일이 없기에
안젤라는 아이들없는 시간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떡하지...
안젤라는 아이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막 등교를 했지만, 안젤라는 하교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아이들 손을 얼른 잡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