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태어난 곳으로(2)
우연은 정신이 없었다.
우연은 정신이 없었다. 동아리 발표를 준비한답시고 함께 짜인 조에는 우습게도 혜정이 있었다. 제비뽑기로 조를 뽑은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다섯 명을 구성하라는데 혜정이 먼저 우연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마.
혜정은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우연의 소매 끝자락을 붙잡았다. 우연이 보기에도 혜정의 손끝은 지나치게 떨리고 있었다. 차라리 이럴 거면 소매자락을 놓는 게 낫지 않을까. 괜히 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는데. 우연은 혜정의 손을 바라봤다. 그 애의 손은 어릴 적보다 더 탁해졌다. 꼭 어른들이 말하길 신앙을 버려 마음이 탁해진 것처럼 혜정의 손도, 우연의 손도 모두 탁한 검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얼떨결에 달라붙은 두 명의 남녀 곁에 세 명의 무리가 달라붙었다. 아, 거기 두 명 맞죠? 친구예요? 아니면 사귀는 사이? 저희 세 명인데 같이 붙어서 발표 진행할까요? 우연은 슬슬 혜정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차피 수도 딱 맞고 다른 사람들도 슬슬 정한 것 같으니 잘해봐요, 우리. 혜정은 어느새 우연의 소매자락을 놓고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웃었다. 남자 셋의 시선은 죄다 혜정에게로 갔다. 사람 구분 없이 서글서글 웃어대는 혜정의 저 표정은 우연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지독한 비밀. 그래서 우연은 어색하지 않게 혜정과 함께 웃었다. 그렇게 다섯 명의 팀이 구성됐다.
동아리 회장은 간단한 오티가 끝났으니 이제 해산하라고 했다. 공식 회식은 다음 첫 활동 때 있을 예정이니 괜히 실망들 하지 말고 각자 볼일 보러 가라는 뜻이었다. 우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혜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혜정은 우연의 곁으로 왔다. 그리고 다시 소매자락을 잡았다.
할 이야기가 있어. 난 긴팔밖에 못 입으니까 에어컨 튼 카페에서 대화해.
우연은 흘긋 혜정의 윗도리로 시선으로 훑었다. 안에는 체크 무늬 반팔에 겉은 베이지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결국 혜정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가자는데 그럼 따라가야지. 혜정이 먼저 앞장섰다. 둘은 학교를 나와 사람이 적당히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몸을 들여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 눈가가 절로 건조해지는 느낌에 우연은 에어컨 곁을 떠나고 싶었으나 오는 길에 땀을 뻘뻘 흘리던 혜정은 에어컨 앞에서 땀을 식히고 있었다.
왜 부른 거야.
우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열등감과 호기심이 공존하는 우연의 세상에서 혜정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왜 불렀어, 그러니까 왜 불렀냐고. 우연은 속으로 혜정에게 몇 번의 말을 해댔다. 제발 아무 말이라도 해 봐.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지 말고. 이 죽을 것 같이 더운 여름에 가디건은 왜 입고 다니는 건데. 뭐가 문제인데. 넌 어떻게 살아왔는데. 우연은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궁금한 것 때문에 혜정을 바라보는지, 열등감 때문에 혜정을 바라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식상한 말이었다. 우연은 힘이 빠졌다. 장난하나? 이건 커다란 장난인가? 우연은 맥없이 대답했다.
그냥 그랬어. 그냥 적당히 살았어. 너는?
나도 그랬지. 그냥 똑같이 살았어.
고등학교 때 상 많이 탔다고 들었어. 우리 부모님이 전해주셨거든. 열심히 산 것 같더라. 늦었지만 축하해.
그냥 운이 좋았지. 고마워.
식상했다. 고작 이런 대화를 하려고 우연을 불렀던가. 혜정은 언제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까……, 너 교회 다녀? 아직도 교회 다녀? 너 나랑 같은 편이야? 아니, 애초에 이걸 편가르기로 나눌 수 있을까? 이 지독한 흑백 논리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이해의 영역으로 넘어가 숨 쉴 수는 없는 걸까? 바벨탑을, 바벨탑을 완공할 수는 없었던 걸까. 신이 잘못했어.
우연은 당황스러웠다. 대화가 끊겼다. 거의 일 분은 됐다. 음료는 반절이 넘게 남았고 카페는 조용하게 소란스럽다. 마치 모두가 우연과 혜정의 대화에 관심을 끌고 있는 듯이. 우연은 혜정의 눈을 바라봤다. 이미 죽은 동태눈. 흐린 눈빛. 세상을 잃어도 괜찮다는 저 안일함. 저 눈빛은 어디서 온 걸까. 분명 잘 산 것 같던데. 우연은 궁금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궁금한 거 없어?
혜정이 말했다. 꼭 면접 같았다. 삶의 면접. 당신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오셨습니까. 삶의 목표는 있습니까. 당신의 눈빛은 아직 빛나고 있나요. 혹시 당신의 자녀에게 당신을 투영하는 것은 아닌가요. 당신은, 그러니까 당신은, 궁금한 점이 없습니까, 이 세상에?
잘 모르겠네.
우연은 마음 그대로를 내비쳤다. 말하고 싶은 문장이 넘쳐나는데 도무지 입에 담을 수가 없어. 어떡하지. 그래, 잘 모르겠어. 그러자 혜정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먼저 일어날게. 오늘 집에 일찍 가야 해서.
우연은 어이가 없었다. 이럴 거면 왜 부른 거지. 내가 대답을 잘못 했나. 우연은 마구 생각했다. 남은 것은 회의와 궁금증 뿐이었다.
* * *
야, 이 미친년아. 너가 사탄 마귀에 씌인 게 틀림없어. 내일 가서 기도라도 받아. 목사님께 이야기 해뒀으니까 당장!
아, 싫어, 싫다고! 종교의 자유도 없어? 여기 공산주의야? 위대한 수령님만 믿어야 해? 나도 이제 사춘기 넘어선 고등학생이야. 언제부터 성서를 믿으면 천국을 보내준댔어. 언제부터 아는 사람만 천국을 보내 준댔냐고. 언제부터, 언제부터! 매일 돈이나 받아 쳐먹고 회계에서 뒷돈으로 목사한테 들어가는 거 모를 줄 알아? 이 교회만 그러겠어? 그렇게 믿고 싶으면 발목 잡혀서 이런 교회에 있지 말고 정상적인 데로 옮겨! 이게 사이비지 뭐야. 이게 세뇌고 사이비지. 엄마도 정신 차려. 엄마도 정상 아니야. 여기에서 정상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리는 전부 미친 인간들이야.
혜정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새벽 한 시였다. 이미 자정이 지나 일요일이 되었고, 부모님과는 교회에 나가야 한다며 대판 싸웠다. 꼭 얼굴에서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사랑이 최고의 덕목이 되었지. 어차피 사랑은 편애가 있어야 자각될 텐데. 어떤 편애가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는 걸까. 혜정은 불빛이 환하게 켜진 편의점에서 아메리카노 하나를 집어 들며 생각했다. 그래, 차라리 이때 우연이라도 있었으면 연락을 했을 거야. 오늘은 대충 이십사 시간 하는 노래방이나 스터디카페에서 밤새우고 내일 낮 언제나 들어가면 되겠지. 혜정은 계산을 마치자마자 아메리카노 한 병을 원샷했다. 고등학생이었으므로 술은 마실 수 없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공부나 하자. 책도 없고 수중에 든 건 지갑에 핸드폰이지만 핸드폰으로 뭐라도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새벽을 지새우면 되겠지. 신년마다 드리던 예배에서도 축복받는다며 새벽 세 시까지 목사님 앞에서 선 채로 대기를 탔는데 그깟 밤새우는 일 하나 못하겠어. 혜정은 일 킬로미터 떨어진 스터디카페까지 두 발로 걸었다. 빠른 걸음이었다. 어제는 지겨운 해가 느리게 졌고, 오늘은 비가 으슬으슬 오다가 정오 즈음에 멈췄다. 대충 가디건만 걸쳐입은 혜정은 지금이 선선한 여름밤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남자 셋은 발표는 뒷전이고 여자나 사귀기 위해 들어온 목적이 더 강한 것 같았다. 혜정은 단박에 이를 눈치챘고, 우연은 그런 혜정을 보호하느라 매번 남자 셋이 혜정 곁을 둘러쌀 때면 별 같잖은 핑계를 대면서 혜정을 뒤로 빼냈다. 오늘이 그랬다.
발표 준비를 하다 말고 영화나 보러가자던 남자 셋의 말에 우연은 혜정과의 사이를 아예 못 박아버렸다. 얘, 오늘 내 자취방 가서 놀기로 했어요. 그냥 영화 보고 이것저것 놀 거예요. 얘 오늘 바빠요. 그런 우연을 혜정은 벙찐 표정으로 바라봤다. 혜정의 눈과 우연의 눈이 지겹도록 마주쳤다. 둘은 소리 없는 대화를 남자 셋 앞에서 나누었다. 네가 뭔데 나를 자취방에 데려가. 꼬우면 쟤네 따라가서 영화나 보고 오던가. 둘의 신경전에 남자 셋은 조용히 발표 자료나 뒤적이며 허황된 글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혜정이 웃었다. 그래, 오늘 진지한 이야기 좀 해보자. 쟤네들 가고, 네 허름한 자취방이나 가서 그거 이야기 해보자고.
그거 이야기하자는 소리에 남자 셋의 눈이 번뜩 뜨였다. 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다가 큭큭 웃던 놈들은 혜정과 우연을 놔두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면서 도망을 쳤다. 그제야 혜정이 의자 뒤로 몸을 쭉 뺐다.
사람 다루는 일 어렵네. 바깥 성격 조절하는 것도 어렵고 성격 싹 다 갈아엎는 것도 힘들어. 그래, 너는 내 성격이 어느 정도 적응이나 되냐? 알면 안내해. 내가 말한 그거 할 생각은 없고 왜 내가 매일 가디건이나 처 입고 다니는지 알려줄 테니까. 그 지독한 방황 동안 내가 얼마나 양아치처럼 살았는지 알려줄 테니까 안내해.
그 말에 우연은 눈을 크게 떴다. 혜정이 양아치라니, 양아치처럼 살았다니, 영어학원 들어오자마자 만점 받은 애가 무슨 양아치 짓이야. 그러면서 우연은 가방을 쌌다. 필통을 대충 처넣고 아이패드도 가방에 욱여넣었다. 귀찮았다. 창문 안으로 저며 들어오는 햇살도, 오후 다섯 시의 노릇노릇한 햇빛도 전부 지겨웠다. 그래, 차라리 바다에 빠지는 게 낫지. 겨울 바다에 빠져서 숨 못 쉬는 게 내게는 어울릴지도 모르지. 우연은 혜정이 가방을 싸는 동안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혜정아, 너는 여름 바다에 어울리는 빛나는 사람이고 나는 겨울 바다에 어울리는 인간이다. 나는 시커먼 바닷속으로 들어가 심해어라도 되어야 해. 두 눈이 멀어서 네게 뭐라도 믿으라며 소리 질렀던 어린 날에 사죄해야 해. 그게 아니면 여름의 태양 같은 네가 햇살로 폭력을 저질렀다고 내게 사과하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