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발 지팡이를 잡게 되기까지
2/28일요일
드디어 병원 밖에 있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그곳은 평소 내가 자주 찾던 체인점이었다.
병원을 벗어나니 환자들을 위한 장소가 아닌 걸 확실히 느꼈다. 좁은 간격으로 붙어있는 테이블과 의자들. 서있는 내내 엄마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비집고 들어가야했다. 아직 휠체어에 의지해야하는 나로서는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휠체어는 다른 곳에 얌전히 주차를 해두었다. 그리웠던 촉촉한 빵과 샐러드를 커피와 함께 즐겼다. 아, 얼마만에 맛보는 메뉴인가! 사실 며칠전 오늘 이 순간을 위해 미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리는 연습을 따로 했었다. 덕분에 모든 이동이 순조로웠다.
오늘 아침에는 엄마의 구박을 엄청나게 받았다. 식사중에 갑자기 대변 신호가 느껴지는게 아닌가? 급하게 숟가락을 내려놓고 도움을 요청했다.
일단 식사가 나온 뒤에는 침대를 벗어나려면 수속절차가 복잡했다. 테이블을 펼쳐 차려놓은 음식 그릇들을 하나하나 옆에 놓여있는 보조침대에 내려놓고 다시 테이블을 접어야 했다. 왜 하필이면 그 때 변을 보고 싶어지는건지. 손이 빠른 엄마가 해도 시간이 꽤나 걸리는 일이었다. 엄마는 접어둔 워커를 부랴부랴 펼치면서 "아침에 좀만 더 일찍 일어나서 누지 그랬냐!"며 꾸지람을 했고 나는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저 혼자서 화장실에 갈 수 없음이 원망스러웠다.
일을 다 보고 다시 돌아와서 먹던 밥을 마저 먹기 위한 절차가 다시 진행됐다.
그때 내 상태는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하게 걸었지만 안정적으로 걸으려면 여전히 워커의 도움이 필요했다. 발에 마비가 심해 발 부리가 어딘가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발목 힘도 약해서 빨리 걷기도 힘들었다.
내일도 휴일이다. 그럼 오늘처럼 또 로비, 정원과 까페 앞 전시장 그리고 다른 공간들을 다 누비고 다닐 것 같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더 피곤하다. 이 피곤함은 잠깐 생길 뿐. 운동량을 늘리면 조금씩 줄어드는 걸 느꼈다. 실은 지금도 어딘가에 눕고 기대고 다리를 쭉 뻗고 한 숨 자고 싶다. 지금 여기는 n층에 ‘00센터’ 앞 패브릭 안락 소파이다.
앙상했던 다리가 자주 움직인 덕분인지 드디어 원래 다리의 굵기로 돌아오고 있다. 나는 내 통통하고 튼튼한 다리를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안도했다. 하지만 엉덩이 살과 근육이 적어 휠체어에 앉을 때 황금계란 30알이 박힌 것처럼 생긴 욕창방지 에어방석이 필요했다.
인터넷에서 ‘길렝바레 증후군’을 검색하면 발병 원인, 증상, 예후 등이 상세히 나온다. 그 중에서 내가 주목한 정보는 투병기에 해당하는 ‘백만분의 1’이라는 책과 BBC에서 4년전 제작한 다큐 ‘Locked in my body’였다. 좀더 깊고 전문적으로 서술된 웹 페이지에는 이 병이 워낙 특이하고 양상이 모호해서 예측도 어렵기 때문에 의사, 간호사 자격 시험문제에 자주 등장하고 대개 답을 잘 맞춘다고 한다.
3/1월요일
오늘 날씨는 ‘나쁨’이다. 그래서인지 건물 안으로 산책하러 환자들이 많이 나왔다. 아직 오전11시도 안됐는데 벌써 배가 고프다. 토요일부터 시간이 많이 남아서 걷기를 온종일 했더니 발목이 뻐근하다. 아마도 피로가 누적된 듯. 근육들이 탄력을 잃고 흐물흐물해서 일어났다 앉는 자세를 하면 신음소리가 절로 나온다. 또 앉았다가 일어서려고 해도 똑같은 신음소리가 나온다.
휠체어를 졸업하고 네 발 지팡이를 짚기 시작했다. 여전히 한 걸음씩 발을 바닥에서 뗄 때마다 붕붕 뜨는 느낌이 있었다. 담당 치료사는 지팡이를 처음 써보는 나에게 충고하길, 도구로만 쓰도록 하고 너무 의지해서 없으면 안되게 적응해버리면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 역효과가 난다고 했다.
3/2화요일
분홍색 표시 : 걷느라고 통증이 생긴 부분
연두색 표시 : 마비풀림이 진행중인 부분. 손바닥 좌우는 모두 연한 녹색. 발바닥은 더 연한 녹색.
간지럼 잘 타고 왼쪽은 살짝 과민.
현재 다리 특이사항은 좌우 발바닥 아치 부분이 피로가 쌓이면 욱신거리며 통증이 있다. 오른 무릎은 아직 이상 없음. 왼쪽 무릎은 걸을 때 땅을 딛고 뒤로 밀면서 힘을 주다가 접으려고 하기 시작하면 얇은 뼛소리가 ‘딱’ 하고 한 번씩 난다. 그래서 느리고 무겁게 발을 떼어보기도 하고 빠르고 가볍게 떼어보기도 하니 전자때는 소리가 안 나고 후자때는 다시 소리가 났다. 발가락들은 아직 먹먹하고 내 힘으로 구부려지지 않아서 손으로 주물러주면서 구부렸다 펼쳤다를 반복한다. 특히 가장 굵고 힘이 센 엄지발가락을 꼼꼼하게 주무르려고 한다. 손에서는 손등보다 손바닥이 일상적으로 분명한 증세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아직 촉감이 좋지 못하고 두 손을 맞대고 비비면 손과 손 사이에 모래를 한 겹 깔아놓고 마찰하는 느낌이 있다. (마치 자글자글, 와글와글, 입 안에서 마른 과자를 씹는 것이 연상된다.)
그런 와글, 자글한 촉감이 배꼽 주변 피부에도 있다. 아직 배 아래는 모든 것이 불안정하다. (겉모습은 멀쩡하지만.) 마비가 덜 풀려서 그런 듯 티셔츠가 부드럽게 스치거나 바지 허리 고무줄을 배꼽보다 위나 아래로 편하게 입으려고 손을 넣으면 또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자글자글하다. 내 배에 그런 촉감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낯설다.
옷을 당기고 좌우로 배의 피부에 마찰시키면 자글자글한 느낌이 있다. (모래바람이 스치는 촉감으로.)
손바닥에도 그런 비슷한 느낌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각 부위마다 다른 근육의 밀도, 결, 두께에 따라 촉감이 다양한 것 같다.
**상체 마비는 80% 정도 풀린 듯. 아직 근전도 검사결과가 안 나왔다고 했다. (3/1어젯밤 기준) 어깨 힘. 손목 힘이 탄력, 탄성 회복력의 문제로 약해서 걸을 때마다 힘을 덜 쓰려고 한다. 무거운 물건은 하나도 들지 못한다.
**장애인 전용 목욕 의자는 방석의 구멍이 너무 커서 불편하다. 한눈에 봐도 특이한 이 의자에는 브레이크 장치가 달린 바퀴 네 개가 달려있고 휠체어처럼 등 뒤에 밀고 당길 수 있는 손잡이가 길게 나와있다.
1.방수매트. 구멍이 커서 허벅지가 빠진다. (검정색 방석)
2.환자와 보호자의 입장이 가장 크게 충돌하는 시간은 목욕시간. 내 말도 안 듣는 내 몸뚱아리와 씨름을 하다보면 불편해도 어쩔 수 없이 보호자가 진행하는 대로 따를 수 밖에 없다. 샴푸질을 더 정성스럽게 하고 싶지만 너무 오래 걸리니까 대충하고 얼굴의 각질을 충분히 불리고 오래 마사지하면서 밀어내고 싶지만 이것도 너무 오래 걸려서 가볍게 끝낸다. 샤워가 끝나고 물기를 닦을 때 보호자의 빠른 손에 그냥 물에 젖은 내 몸을 맡긴다.
3.손가락 관절이 아직 빡빡해서 빠른 손놀림을 할 수 없다. 답답한 마음에 손가락 끝에는 힘을 주고 손바닥과 팔꿈치 운동으로 빠르게 샴푸거품을 낸다.
4.상체를 숙여서 몸을 접을 때 팔걸이에 팔을 잘 걸어야 앞으로 쓰러질 염려가 없다.
(등에 마지막 거품을 헹구려고 엎드린 모습)
5.엉덩이 비누칠이나 헹궈낼 때는 한 짝씩 들어올려야 가능하다. 걷지 못했을 때 이 자세는 너무 어렵고 위험한 자세였다. (환자용 의자에 앉아서 오른쪽 엉덩이만 살짝 들어올린 모습)
***아무튼 입원 직후에는 다리 힘, 팔힘이 부족해서 의자 위에 버티고 앉아있기가 어려웠는데 이제는 여유롭게 앉아있을 수도 있고 의자가 오히려 불편해서 서서 몸의 물기를 닦을 수도 있다.
(다음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