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중환자실에 적응하기
중환자실에서 자가호흡이 돌아오고
새로 들어간 병실은 준중환자실.
내 자리 양쪽에는 두 할머니가 있었다.
첫날 아주 조용하고 빛의 방해없이 꿀잠을 잤다.
아마도 양쪽의 할머니들은 스스로 호흡을 하는 덕분인지
요란한 소리를 내는 기계들은 없었다.
하지만 두 분 모두 의식은 있으나
소통을 제대로 할 수는 없어 보였다.
가끔 중년이 된 자녀들이 면회를 오면
소통이 잘 안되니까 일방적으로 말하다가 가곤 했다.
어느날은 말 한마디 안하던 할머니가
체위변경때 간호사들에게 저음의 목소리로
“멍청이들”하고 입을 떼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흥분했다.
"오!!!! 할머니가 우리더러 멍청이라고 말했어!"
"할머니! 다시 한번만 멍청이들아 해봐바!"
다음 이어질 이야기는 목욕.
몸을 스스로 깨끗하게 못하고
남에게 맡기고 누워있은지 44일.
병이 호전됨에 따라 준중환자실로 옮겼더니
그 곳에는 중환자실과 달리 전신을 소독해주지 않았다.
중환자실에서는 그 덕분에 늘 마음이 놓였는데.
조용한 병실을 옮겨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더니
중환자실에는 없던 문제를 마주해야했다.
이곳에서의 간호방법은 달랐다.
머리를 물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거품샴푸로 감겼다.
처음엔 평범한 액체인데
머리에 부어서 적시고 비비면 거품이 났다.
그 다음 수건과 휴지로
머리칼의 물기를 닦기만 하면 끝난다.
아니 그럼...
머리에 묻은 그 액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증발했나?
아무튼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기는 대신
거품샴푸로 대체됐다.
머리감기가 끝나고 뒷목의 피부는 눅눅해져서
따로 바람을 쐬며 말려야하는 상태가 됐다.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중환자실에서는 사용했었던 드라이어를
준중환자실에서는 화상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쓸 수 없다고 했다.
내 목 뒷덜미는 그 후로 점점 빨갛게 헐기 시작했다.
아니나다를까 무척 쓰라리고 따가웠기 때문에
다시한번 드라이로 뒷머리 말리기를 부탁했다.
내 말을 집중해서 경청해준 사람이 있었다.
무척 고마웠다.
그 전에는 정식의무가 아니다보니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었다.
하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일반병동에서의 목욕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중환자실에서 쓰던 머리감는 도구가
일반병실에도 따로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대여 절차가 따로 없는데다 까다로웠다.
이건 완전히 간병인의 눈치와 노력에 달린 문제였다.
도대체 왜?
목욕도구를 둘러싼 그 이상한 상황을 계속 지켜봤다.
아마도 내가 모르는 무언의 신경전이 생긴 것 같았다.
간호사들이 우리들의 요청을 듣고 한참 후에
도구를 가져왔고
간병인은 안절부절 못하며 머리를 감겨주기 시작했다.
아마도 병원내에 존재하는 암묵적인 규칙을 어겼거나
선을 넘었다고 느낀 것 같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아직도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없고 마음이 불편하다.
중환자실을 벗어나서
새롭게 들어가게 된 준중환자실에서는
다른 간호사가 나를 구원해줬다.
양치질과 머리감기에 대한 도움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 준중환자실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고립감을 느끼고 말았다.
서로에게 미루거나
나의 요청을 다른 말로 덮어버리는 상황들을 목격했다.
처음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우울해보였던 것 같다.
그것을 눈치챈 담당 간호사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대화를 나누다가
나에게 필요한 도움을 편안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내 입모양을 하나도 놓치지 않던 그녀는
잘 알았다며 커튼 뒤로 사라졌다.
그 다음 그녀가 출근한 날부터
헤어 드라이로 머리를 ‘바싹’ 말리기와
하루 한 번 이 닦기를 정식으로 도움 받게 되었다.
너무나 고마웠다.
중환자실에서도 하던 양치질을 못하게 돼서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그때의 내 마음을 잘 이해해줬고
아무도 기분이 나쁘지 않게 잘 전달한 것 같았다.
그녀는 어려 보였지만 나에게 보여준 책임감으로 보면
진실한 직업정신을 갖춘 프로였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혼자 심심하면
회진과 체위변경 시간 사이사이에
TV예능프로 삼시세끼를 감상했다.
TV 모니터는 침대 발치에 있던 모니터 2대 중
놀고 있는 하나가 있었는데
내가 누워서도 볼 수 있도록
간호사들이 내 쪽으로 화면을 돌려주었다.
매회마다 화면에 등장하는
온갖 풍성한 음식메뉴들을 보고 괴로웠다.
아무리 평범하고 단조로운 식단이라도
나는 그것들이 무척 먹고 싶었다.
심지어 맞은편 자리에 입원중이던 어느 중환자가
식사시간에 병원밥을 씹어 먹고 있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환자는 알았을까?
누군가가 자신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하고 있었다는 걸.
중환자실에서 회진시간에
이제 입으로 밥을 먹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만해도 불가능하고 먼 일 같았는데
어느새 그때보다 많이 회복이 된 것이 다행스러웠다.
자가호흡 다음으로 넘어야 할 산이 음식이었다.
나의 어깨와 팔 근육 힘이 어느정도 돌아왔을 즈음
연하검사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의사는 밥을 씹어 삼키면 우울함도 나아질 거라고 했다.
나도 그때 너무너무 밥을 먹고 싶었다.
내 콧구멍에 꽂힌 콧 줄은
영양분을 공급받는 하나의 통로였다.
그리고 삼킴장애로 인한 폐렴을 차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일 내 입과 목에 근육에 마비가 오지 않았으면
음식이나 물, 침 삼키기가 별 것 아니었겠지만.
마비로 근육의 힘이 상실되면서
제대로 받아넘기지 못하는 상태였다.
연하검사실은 병실 아래층에 있었다.
검사를 받으려면 먼저 휠체어를 타는 연습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내려가면
다른 환자들도 검사받으러 와있으니까
대기시간이 있다고 한다.
휠체어에 앉아서 앞 사람 기다리는 시간까지
넉넉잡아 20-30분을 버텨내야 했다.
드디어 휠체어 연습하는 날,
간호사가 곧 휠체어를 가져올거라고 말했다.
병원에 와서 거의 한달 반동안
침대를 벗어나본 적이 없어서
갑자기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내 몸 상태를 제대로 몰랐다.
병원침대는 환자의 상체를
직각으로 세워줄 수 있도록 꺾인다.
나는 침대에 기대어
서서히 45도보다 더 세워졌을 무렵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듯이 아팠다.
그건 마치 다리찢기를 무리했을 때와 똑같은 아픔이었다.
90도까지 허리를 똑바로 세워야
휠체어에 등을 붙이고 앉을 수 있는데
이렇게나 아프다니 큰일이었다.
앉아 있는 자세만으로도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평소 같았으면 너무 편한 자세일텐데
그때는 통증 그 자체였다.
내 허리, 엉덩이에 연결된
모든 다리의 근육들이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침대에 앉아있는 것조차도 힘들어서
그날은 휠체어 타기를 포기했다.
팽팽하게 당기는 근육들이
여기저기서 이렇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매일 누워있더니 왜 이제 앉으려고 하는거야!
가만히 누워있어! 아아악!
나는 그런 저항에 맞서느라고
45도와 90도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다리를 찢은 것 같은 미칠 듯한 당김이
너무 아파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나를 도와주던 간호사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내가 그냥 하기 싫거나
힘들어서 우는 줄로만 아는 것 같았다.
내가 그때 얼마나 아픈지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다음 연습날, 간호사들은
미리 앉는 것부터 연습해보자고 했다.
앉는게 되면 그때 힘이 센 사람을 불러서
몸을 들어 옮겨주겠다고 했다.
(다음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