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관대하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한 사람과, 타인에게 엄격하지만 자신에게는 관대한 사람. 나는 전자일까 후자일까?
예전의 나는,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엄격한 사람이었다. 자신에 대한 기준이 높은 만큼, 타인도 그 기준에 맞아야 함께 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정답이 아닌 걸 안다. 타인에 대한 기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주변에 사람이 많이 없다. 왜냐하면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을 굳이 옆에 두지 않거나, 실체를 알게 된 순간 인연의 끈을 잘라내기 때문이다. 굳이 맞지 않는 사람을 옆에 둬서 스트레스를 받느니, 잘 맞는 사람 소수와 함께 가겠다는 마인드이다. 그렇다. 내 얘기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는 진리가 있지만, '쉽게' 안 변할 뿐이지, 본인의 노력에 따라 변할 가능성도 있다. 이것도 내 얘기다. 스스로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한 케이스인데, 최근 들어 조금씩 변화가 보이는 듯하여, 그에 대한 단상을 기록하고 공유하고자 한다.
천성이 예민한 사람은 종종, 뾰족한 예민함을 둥글게 만드는 스킬이 필요할 때가 온다. 예민함이라는 도구가 창작 활동과 같은 섬세함을 요하는 작업에는 큰 도움이 되지만, 자칫 자신을 찌르는 도구가 된다.
섬세한 감각은 타고나는 것이기에, 날카롭게 잘 다듬어진 섬세함을 무디게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섬세함이라는 무기를 잘 품고 있다가 써야 할 때에 쓰고, 잠시 넣어 두어야 할 땐 넣어두는 영리함이 있었으면 한다. 마치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하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창작 활동, 예를 들어 글쓰기나 영상 제작에는 최대한 섬세한 감각을 발휘하되, 인간관계에서는 잠시 넣어두기로. 완벽한 사람은 없다. 즉, 나 또한 타인에게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은 부족함을 서로 채워주며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데,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워서는 그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다.
나의 부족한 면을 보여주어도 괜찮다. 부족한 모습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일 것이고, 반대로 그 모습이 싫은 사람은 내 사람이 아닐 뿐이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정말 간단해진다. 내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서 떠날 사람은 애초부터 내 사람이 아닌 게 낫다. 그리고 '조금 부족하면 어때? 니들도 까놓고 보면 부족하잖아.' 이런 깡으로 똘똘 뭉친 마인드가 중요하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야겠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들어도 의연해질 수 있다. 물론 그런 언행들이 반복된다면 강하게 맞서야 하겠지만, 살면서 상대방에게 말실수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상대방의 진심과는 다르게 오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니 그렇게 따지면 나도 실수 꽤나 하며 살았을 수도 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말의 화살이 나를 향하는 것보다 상대방을 향하는 횟수가 더 잦았으면 한다. 화살이 나를 향하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자기 합리화와 넘치는 자기애로 똘똘 뭉쳐서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대방에게 향하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상대방이 한 실수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게 되어 내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실수했겠지. 나 또한 실수하는데 뭐.'라는 마인드 말이다. 이게 습관화되면 얻는 게 생각보다 많아진다.
먼저, 평정심과 의연함. 그리고 상대방과의 관계를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초반에 언급했다시피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엄격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너그러워지기로. 나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하지 않아도 된다. 그 누구보다 역경을 잘 이기며 지금까지 잘 살아낸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인데, 칭찬해주지는 못할 망정 가장 아껴주어야 할 내게 엄격하게 군다면 얼마나 서글플까. 그래서 나는 내게도, 타인에게도 보다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나와 타인, 모두가 할 수 있는 실수에 대해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아끼지 말아야겠다.